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할 때, 진복창과 이기가 왕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서로 어울려 정사를 농락하였다. 그때 진복창이 임금으로부터 남색 비단으로 만든 옷과 친필을 하사받았다. 진복창은 너무 감격한 나머지 임금의 친필을 족자로 만들어 대청에 걸어놓고 사람들을 모아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자 수많은 문인과 명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때 윤결은 수찬에 있었는데, 숙직을 핑계로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복창은 자신의 심복으로 하여금 대신 숙직을 하게 하고 억지로 윤결을 참석토록 하였다. 결국 윤결은 더 이상 핑계를 대지 못하고 잔치에 참석하였다. 잔치에 참석한 윤결은 큰 술잔으로 서너 잔을 연거푸 마시고 짐짓 정신을 못 차리는 척하며 진복창의 새 옷에 오물을 토해버렸다. 진복창은 깜짝 놀라 오물을 털며 말하였다. "누가 그대의 주량을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는가? 벌써 술에 취한 모양이군."
진복창은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짐짓 태연한 척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윤결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 이튿날, 어떤 사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윤결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그의 옷에다 토악질을 하였소? 그의 안색이 꿈쩍도 하지 않고 손으로 오물을 훔치니 아마도 그대를 지극히 존중하는가 보오. 그런데 어찌 그를 찾아가 사과하지 않는 것이오?" 그 말을 들은 윤결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간악한 자가 준 술을 어찌 내 뱃속에 남겨두겠소? 더구나 임금께서 내리신 옷이 간악한 자의 몸에 합당하기나 한 것이오? 내가 토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결국 그는 이 일로 미움을 받아 임금께 불량한 말을 했다는 모함을 입고 고문당한 후 유배되었다. 윤결은 출옥한 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하늘에 해가 저렇게 밝은데 내 어찌 죄 없이 죽겠는가?"진복창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노하여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윤결은 음식을 끊고 여덟 차례나 고문당한 끝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
윤 결(尹 潔)
1517년(중종 12) ~ 1548년(명종 3).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자는 장원(長源), 호는 취부(醉夫) 또는 성부(醒夫)이다. 1537년(중종 32) 진사가 되고, 154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48년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으나 필화사건으로 참형된 안명세(安明世)의 정당함을 술자리에서 발설한 것이 빌미가 되어 진복창 등의 밀고로 국문을 받던 중 옥사하였다. 그의 동생 준(浚)도 윤원로의 죽음이 윤원형 형제의 싸움 때문이라고 말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