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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선비정신 = 87]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과 논개(論介)

리효종 포천한시사 대표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8년 01월 03일

해는 바뀌어 계사년(癸巳年). 왜군은 본국의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명에 의하여 전년의 진주성 싸움에서의 수치를 씻으려고 하였다.

이 때 명나라는 화(和)로써 왜적을 물러가게 하려는 계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명장으로 적군을 뒤쫒아 남하한 자는 대개가 안병부전(按兵不戰 : 군사를 한 자리에 멈추고 싸우지 않음)의 태도를 취하였다.


그 때 우리편 군사들은 조정의 명에 의하여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순찰사 권율 이하 관병과 의병이 모두 의령에 모여 있었으나, 감히 먼저 치지 못하였다. 권율이 제장을 꾸짖어 강을 건너 함안에 이르렀으나, 내습하는 적군의 기세가 너무 어마어마함을 보고 모두 흩어져 달아났고, 권율과 김명원 등은 먼저 호남으로 피해 들어갔다.


오직 창의사 김천일만이 분발하여, 제장에게 이르기를, "진주는 호남과 순치(脣齒)의 땅이다. 진주가 없이 호남이 있을 수 없다. 성을 버리고 적을 피하여 적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비계(非計)이다. 힘을 다하여 적군을 막는 이만 못하다."라고 역설하였으나, 제장은  응치 않고 흩어져 가는 사람이 많았다.   


김천일은 이에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 병사 황진(黃進),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사천 현감 장윤(張潤)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으로 들어가니 이 때 김해 부사 이종인(李宗仁)은 먼저 입성해 있었다.


성내의 군사는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하였으나 남은 백성들은 무릇 6, 7만에 달하였다. 그리고 먼저 이방장, 강희열(姜熙悅), 이잠(李潛) 등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 때의 목사 서예원(徐禮元)은 본래 겁이 많고 병법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모든 방수(防守)의 계책이 김천일에게서 나오니, 주객이 서로 맞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의 군병과 우리 편의 군사들은 다 방관적인 태도를 취해 진주성은 저절로 고립 상태에 빠졌다.


진주성은 험고한데 웅거하여 있었는데, 동쪽은 좀 평탄한 지세였다. 김천일은 제장으로 하여금 부대를 나누어 구역별로 성을 지키게 하고, 황진, 이종인, 장윤 등에게 군사를 이끌고 기동적으로 돌아다니며 구급 응원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와같은 분담과 약속이 이미 정해지자 모든 장졸들은 다 죽기를 맹세하였다.


6월 스므날, 왜군의 선봉이 성 경계에 이르자 오유, 이잠 등은 성에서 나가 적의 정세를 살피고 몇 놈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오니 우리편 군사의 사기가 높아졌다.


이튿날, 약 5만 명의 적의 대부대가 성을 세 겹으로 에워싸고 성 아래에 진박(進迫) 하여 큰 대를 엮어 세우고 그 안에서 총을 발사하니 탄환이 비오듯하였다. 성내에서도 힘을 다하여 이를 무찌르니, 적은 또 밤중에 동문으로 돌아, 함성를 크게 지르면서 성으로 기어오르므로, 황진 등이 힘써 이를 격퇴하였다.


하루는 적군이 갑자기 성의 서북쪽을 공격하여 거의 위기에 빠질 뻔하였는데, 황진 등이 칼을 휘두르며 제장을 독려하여 기어코 적을 물리쳤다. 적이 또 토산을 쌓고 그 위에 올라 성을 내려다보며 칠 때, 황진 등은 다시 높은 언덕을 쌓아 이에 대항하였고, 또 적이 큰 나무 위에 판옥을 짓고 불을 던져, 성안의 가옥이 탈 때, 우리편은 대포를 쏘아 판옥을 분쇄하였다. 그러나 연일 쏟아지는 비로 성 한모퉁이가 무너지자, 적은 그 틈을 타서 공격을 해왔다. 김준민이 힘껏 싸워 보았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때 황진이 성에 올라가 진지를 시찰하다가 홀연 적의 총탄에 왼쪽 이마를 맞아 비장한 죽음을 당하자, 즉시 장윤으로 그를 대신케 하였으나, 그 또한 전사하였다.


동문의 성이 비로 인하여 무너지자 적병들이 개미떼같이 달라붙어 올라오니, 이종인이 고전분투하여 간신히 물리쳤다. 미구에 적군의 정예가 북문에서 칼을 휘두르며 사다리를 타고 넘어 들어오자, 목사 서예원이 먼저 달아나고 지키던 군사들이 흩어져 도망쳤다.


이종인, 이잠, 강희열 등 10여 인은 칼을 휘두르며 적병을 맞아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죽었다. 종인은 죽을 때 적병 한 놈씩을 좌우편 허벅지에 끼고 강물로 뛰어들며 크게 소리치기를,"김해부사 이종인이 여기서 죽노라."하였다.


김천일 등은 그 아들 상건과 고종후(高從厚) 부자와 최경회(崔慶會) 등 수십 인과 더불어 북향재배한 뒤, 남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접전 팔구일 째인 6월 29일, 성이 함락되자 군·관·민(軍官民)이 모두 도륙 당하고, 소·말·닭·개까지도 남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싸움이 끝나자 왜군의 장졸들은 촉석루에 올라 승전의 축배를 들었다. 그 때에 진주 기생 논개는 거짓 아양을 떨며 적장 하나를 유인해 내어 남강 가의 바위 위에서 그 적장을 껴안고 강물로 뛰어 들었다.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원수 한 놈을 죽게 한 것이다. 지금도 촉석루 옆에 그를 봉사하는 의기사(義妓祠)란 사당이 있다.


이상의 사실은 적병에게 붙들렸다 도망쳐 나온 사람들의 보고에 의해서 확인된 것이다. 이 진주성의 혈전이야말로 조선의 혼을 유감없이 발휘한 역사상 일대 금자탑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8년 01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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