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은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 연안에 위치하여, 동은 함안 · 진해, 남은 사천 · 고성, 북은 삼가 · 의령에 접하고, 서는 단성 · 곤양 · 하동을 통하여 전라도에 이르는 요지로서, 목사가 다스리는 곳이었다. 목사 김시민(金時敏)은 본시 진주의 판관으로서 전 목사 이 경(李 璥)의 후임자로 성을 지키게 되었다.
이 때 부산의 왜장 하세가와 도오고로오(長谷川藤五郞)는 동래 ․ 김해의 왜군 3만여 명을 규합하여 우도(경상도 서역)로 침입하는 동시에, 또 수군을 발하여 웅천 해안에 둔거하여 우리 전라도 군사의 진로를 방해하려 하였다. 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이 왜장 도오고로오를 맞아 창원에서 싸우다가 이를 지키지 못하고 물러서니 왜군은 승승하여 함안에 쳐들어와 우리 방어군을 격파하고, 진주성으로 들이 닥쳤다. 때는 임진 10월 5일이었다.
목사 김시민은 성문을 굳게 닫고 병사들에게 명하여 방전의 준비를 만반으로 갖추게 하는 동시에 경거망동하거나 태만하지 말라 하고, 자신은 친히 순시하면서 병사들에게 주식을 주며 위로하기도 하였다.
적군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여 우박과 같은 총탄이 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으나, 한 사람도 맞지 아니 하였다. 얼마 뒤에 총소리는 그쳤으나, 성 안에서는 일부러 태연함을 보이기 위하여 고요히 여러 악기를 연주하였다. 그러자 적은 큰 대나무를 베어다 성 동북쪽에 누각을 만들고 그 위로 올라가서 성 안을 내려다보며, 조총을 어지러이 쏘아댔다. 이에 김시민이 화약을 넣은 화살을 발사케 하여 그 누각을 격파시켜 적으로 하여금 그 꾀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오륙일을 서로 버티고 있는 중에 의병장 곽재우가 용사 심대승(沈大承) 등 백여 명을 보내어 밤에 횃불을 켜들고 성 밖 비봉산 위에 올라가 지원의 형세를 나타내 보이니, 적은 서로 돌아보며 대경실색하였다.
제6일 밤에 적병들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성 밑으로 돌진해 들어와 성을 기어오르려 하자, 성내에서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마른 풀에 화약을 싸서 성밖으로 던지고 혹은 큰 돌을 내리굴리며 끓는 물을 끼얹기도 하니, 화살과 돌이 비오듯하여 거의 기마대에게도 맹렬히 화살과 돌을 연발하여 올라오지 못하게 하였다. 마침내 왜적은 큰 손해를 입고 기운이 꺾이어 포위망을 풀고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김시민이 친히 성루에 올라가 퇴군하는 적병을 향하여 화살을 쏘아 많이 쓰러뜨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날아온 적의 유탄이 이마에 맞아 유혈이 낭자하였으나, 그는 끄떡도 하지 않고 그대로 계속 싸웠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시민은 신음하기 달포만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김시민, 그는 육지의 이순신이라 할 만큼 잘 싸워 대승리를 거두고 죽었다. 성이 포위되기 6일, 그는 병사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부하 사랑하기를 아들과 같이 하여, 병사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용전분투케 하였으므로 마침내 적군을 격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임진 10월의 승첩으로서 제1차 진주 싸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