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미국행위 조사위원회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는 1930년대 나치에 대한 스파이 활동을 조사하고 감시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렇지만 2차 대전 후에는 소련의 성장과 공산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한 마녀사냥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이 위원회의 활동을 시작으로 1940년대 미국의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는 한동안 많은 혼란을 겪었는데 팀웍을 필요로 하는 제작자, 연출자, 배우와 감독 사이에 불신과 반목이 만연했고 불이익 당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동료들을 모함하는 사태를 가져오기도 했다.
1947년 비 미국행위 조사위원회는 공산당에 가입했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을 조사하여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그 블랙리스트의 뿌리는 1930년대 스탈린 사상에 심취한 젊은 이상주의자들에게 있었다. 할리우드의 경우 유니버설 영화사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메이저 영화사들은 정부의 눈치를 보며 반공산주의를 외치는 영화를 만들어냈고 서부 영화로 너무나도 잘 알려진 존 웨인(John Wayne)의 <빅 짐 맥레인(Big Jim McLain)>과 <길티 오브 트리즌( Guilty of Treason)> 같은 영화가 그 선봉에 나섰다. 이 위원회의 활동으로 인해 미국 내의 분위기는 극도로 보수적 성향을 띄었고 그 블랙리스트 속에 있던 다수의 유명한 작가, 연출가, 감독, 배우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거나 때로는 미국을 떠나야 했다.
<물랭루즈(Moulin Rouge, 1953)>와 뮤지컬 <애니(Annie, 1982)>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존 휴스톤 감독(John Marcellus Huston, 1906˜1987), 명작 <카사블랑카(Casablanca, 1942)>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험프리 보가트(Humphrey DeForest Bogart, 1899˜1957), 리처드 어텐보로(Richard Attenborough)감독과 이미 앞에서 살펴본 찰리 채플린(Chaplin) 등이 특히 요주의 인물들이었다.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 1949)>의 작가로 유명한 아서 밀러(Arthur Asher Miller, 1915˜2005)도 블랙리스트에 올랐는데 미국을 떠나 스위스에 정착한 채플린과는 반대로 아서 밀러는 브로드웨이를 지키며 불합리한 위원회에 대항해서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아서 밀러의 극적 사상의 기저에는 급진 좌파연극 형식을 만들어낸 클리포드 오데츠(Clifford Odets)의 영향이 있다. 아서 밀러는 미국 문화의 병폐에 대한 인식을 통해 개인의 약점이 사회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믿고 행동의 심리적 원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특히?1953년 초연된 <시련(The Crucible)>은 1692년 미국 세일럼에서 있었던 마녀재판과 1947년 시작된 비 미국행위 조사 및 심문을 평형선상에 놓고 극적대입을 시켰다. 사실 비 미국행위자 색출을 통해 드러난 모함과 고발의 횡포뿐만 아니라 양심조차 쉽게 내던져버리는 현대 미국인들의 모습을 <시련>을 통해 대신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1952년 연출가 겸 영화감독인 엘리아 카잔(Elia Kazan)은 자신의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있다는데 대한 공포심으로 자신의 극단 단원 8명을 공산당 멤버라고 고발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고변이 있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서 밀러는 세일럼을 방문했으며 <시련(The Crucible)>의 공연을 가속화했다. 1940년대 까지 아서 밀러와 엘리아 카잔은 매우 가까운 친구였지만 이 고변 이후로 그들의 우정은 끝이 났으며 아서 밀러는 비 미국행위 조사위원회와 맞서 다음의 기록에서 보이는 것처럼 결국 정의가 승리함을 보여주었다. "1954년 미 국무성은 <시련(The Crucible)>의 벨기에 공연에 참석하려던 밀러의 여권을 공산주의 활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발급을 취소함. 아서 밀러는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을 부인. 1956년 위원회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던 중 공산당원이었던 자신의 친구 이름을 알려 주는 것을 거부한 이유로 국회 모독죄로 고발. 1957년 유죄판결을 받고 500불의 벌금과 집행유예 30일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아서 밀러는 상고를 했으며 1958년 연방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아서 밀러가 자신의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을 느낀다고 말한 바 있는 <시련(The Crucible)>은 결국 1940년대에서 1950년대 초까지 극단적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집단적 권력 앞에서 희생된 개인의 양심과 인권을 청교도 사회의 마녀사냥을 통해 고발했던 것이다. 아서 밀러는 개인의 존엄성을 말살하려고 하는 자들의 죄과를 폭로하는 것이 <시련(The Crucible)>의 목표라고 생각했던 것이며 "잘못된 가치관으로 죄를 짓고 그 대가로 죽어야 하는 운명을 묘사한 데서 발전하여 그 죄를 깨닫고 죄를 밝혀내는 내용으로 주제를 승화"시켰던 것이다. 그것을 재판정에서 몸소 실현한 것이 아서 밀러였으며 오늘날 브로드웨이를 넘어 세계적인 작가로 추앙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