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공은 지금의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 즉, 함경남북도 육군의 군단장 격의 벼슬이지만 감사보다도 시장보다도 그 권한이 컸던 자리이다.
류경선대감은 병조판서를 제외하고는 실질적으로는 병권(兵權)중의 최고의 군사권의 소유자인 지휘관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 하다.
류경선 병사공께서는 가산면 방축리에서 출생하신 순수한 포천인이셨으며 포천에 묻히신 무관이시며 백성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으셨던 명목민관(名牧民官)이셨다는 점에서 우리는 님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하였으며 포천인 물사의 빛나는 자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화류씨문중으로 자작리에 정착한 柳淙(류종)선생의 현손이며 증 호조참판 계윤(繼胤)의 자로 개국공신 류만수의 6대손이다. 명종8년(1556년) 관사별시(觀射別試)에 급제하여 낭장(명종11년) 도총부도사, 웅천현감에 올랐는데 백성들이 못내 아쉬워 하는 가운데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뿐이 아니었다. 명종17년 제주판관 명종19년 양산군수가 되여 6년간 선치(善治)를 하니 백성들의 존경과 칭송이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한다.
선조2년에는 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이 되고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지금의 서울특별시 부시장)의 임명이 되었다. 선조3년 영암군수 부임 직전, 변방 백성들을 청렴하고 어질게 선치할 경원부사로 특별히 발탁되여 통정대부로승차와 동시에 임명된 일도 있었다.
선조6년 충청수사가 되고 회령부사에 임명되었으며(가선대부:嘉善大夫) 이어서 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함경북도에는 만주 접경여진족 오랑캐들이 자주 침범하여 변방의 어진 백성들을 괴롭히던 시절이어서 북도병마절도사의 자리는 북방의 막중한 자리였다. 특히, 「가선대부(嘉善大夫)」는 종2품 품계로 당상관이었으며 무관의 최고 품계인 「통정대부(通政大夫)→절충장군(折衝將軍)」보다 한 등급 상위였다. 지금의 해군에 해당되는 충청 수사도 역임하였으니 님이 얼마나 나라를 위해 큰 인재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며 나라의 전조(銓曹:관리의 전형 즉, 임명전 사전 심의를 하는 관청)에서 청렴하고 근실한 인물을 발탁하는데 첫째로 뽑혔다는 점에서 그 인물됨을 알 수 있다. 선조8년 1575년 향년 57세로 별세하니 천성이 순미(天性 醇美)하고 효우(孝友)에 독실하며 사리(事理)에 밝았으며 공직(公職)에 임해서는 삼가고 근신(勤愼)하며 청렴결백하여 무관 중에서도 걸출(傑出)한 인물이라는 최고의 평(評)이 역사의 인물임을 증명하고 있다. 현재, 6군단장을 역임하고 퇴역한 서경석 장군(육군:중장)도 방축리 출신이며 현대전술학에서 필수인 「전장감각(戰場感覺)」을 연구하여 고대 대학원에서 군사학강의를 하고있다. 자랑스럽다 아니 할 수 없다. 「명인의 고장에는 뒤를 이을 인물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사실이 아닌가? 생각되여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