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으신 어버이께 십수년 간 병수발을 하고 지극 정성으로 효행을 하였는데 고기반찬을 해 올리지 못 함을 탄식하던 중 하늘의 감응(感應)하심인지 홀연히 꿩 한 마리가 앞마당에 날아들어 와 부모님께 봉양하는 효를 행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효자 이관하는 가산면에 살았는데 종실(宗室) 의성군(義城君)의 현손이다. 어려서부터 품행이 방정 하여 가난한 살림에도 부모 봉양(父母 奉養)에 지극 정성이었다.
밖에서 맛난 음식을 대하게 되면 먹지 않고 갖고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드렸다. 십수년 간 아버지가 병석에서 신음하셔도 귀찮아하는 기색 하나도 없이 온화(溫和)한 모습으로 조석(朝夕)을 거르지 않고 받들었으며 명약(名藥)을 구해도 먼저 맛 본 후 드렸으며 복용 후에는 증세를 꼭 챙기는 효를 다 하였다. 하루는 매끼 드시던 고기반찬을 장만치 못 하여 형제가 모여 앉아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치 않았음인지 꿩 한 마리가 앞마당에 날아 들어와 떨어졌다.
"옳다 되었다. 하느님의 감응하심이라 몇 날은 고기반찬 걱정 없겠군..."
하면서 홀연히 앞마당에 날아와 떨어진 장기 한 마리를 잡아, 찌고, 볶고 삶는 등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부모님 공양을 하였다 한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고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듣고 천지신명(天地神明)의 감응하심이라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어버이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밤중에 목욕재계하고 눈물로 북두칠성님께 빌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환으로 별세하시자 시묘(侍墓)를 하였는데 늘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풍우한설(風雨寒雪)을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숙종조 42년(1716년) 이관하 효자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旌閭)를 세우게 하였으며 급복(給復)을 명받았다 한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첫째, 왕손이라면 위세가 등등하여 고을 원님이나 마을 사람들 알기를 우습게 알던 조선 왕조 시대 인물로 겸손하고 소박하여 청렴하게 살면서 부모님께 효도를 지성으로 하였다는 점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매우 크다는 점이다. 둘째, 「지성이면 감천(至誠 感天)」이란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점이다.
청산에 살던 효자 김기병님도 같은 하늘의 감응으로 효성을 다 하였다는 얘기는 본란을 통해 소개한바 있다.
요즈음 세태를 보라. TV연속극 속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 뺨을 때리는 장면이 여과 없이 방영되며 국제적 망신을 주지 않나 생각 되여지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내 고향 포천의 며느리 모임은 그 수가 늘고 있다한다. 아마도 효자 김기병이나 효자 이관하 같은 효자님들을 본받아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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