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단이 고향이었으나 병자호란 이후, 이동면 연곡리(제비울)에서 살았던 효자는 72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응하고 숙종에게 참봉 벼슬을 제수받은 「촌로 김성대(村老 金聲大)」선생이었다. 15세 때 병자호란을 당하여 노부모를 모시고 난을 피하여 백운산 골짜기에서 살았는데 낮에는 식량을 구하러 다니고 밤이면 글을 읽었다. 「단지지효(斷指之孝)」로 아버지를 소생시킨 효자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효행에만 전념한 탓에 과거에는 늘 낙방의 고배를 마셨는데 72세 숙종19년(1693년)진사시에 응했을때 숙종에게 발견되여 개성 제릉(齊陵)참봉을 제수 받았으니 부임치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였으나 능참봉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2년 뒤(1695년) 졸서하였다 한다. 촌노 김성대 선생은 어려서부터 인품이 준수(빼어나고) 성품이 관후(너그럽고 넉넉하고)늘 마을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으니 그 인물됨을 익히 알수 있는 대목이다.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학문에 힘썼으니 선비의 어린 시절의 본을 보인 것이다. 특히, 효성이 지극한 사람도 하기 힘든 단지지효(斷指之孝: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병중의 부모님의 입에 넣어드려 소생시키는 효자의 마지막 효)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72세 까지 공부하여 진사시(進士試)에 나아갈 만치 끈기가 있는 분이었으며 양반의 명예를 지켰던 인물이다.(서과 급제나 대과 급제를 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조상에 대한 효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당시나 지금이나 백운계곡은 천하절경(天下絶景)으로 선비가 은거(隱居)하고파 하는 곳이며 당시는 국가에서 보호하는 보호림으로 산림이 울창하였으며 골리수(滑利樹)가 많고 맑고 깨끗한 영평천의 발원지였다.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이 아들 창집(昌集) 창협(昌協)과 함께 백운산에 왔다가 주택과 전답을 마련해줄 것을 부탁하고 갔는데 그의 부탁을 받아들여 은거지를 마련해 놓았으나 문곡(文谷)은 모함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촌노(村老) 선생께서는 그 후손들을 의리로 돌본 중후(重厚)한 인덕(仁德)의 소유자였다. 1961년 포천 유림들은 동음사(洞陰祠)에 배향되었으며 박순, 이의건, 김수항 선생이 모셔진 옥병서원(玉屛書院)에도 배향케 되었다. 반드시 높은 벼슬자리만이 높은 선비의 대접을 받는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바 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