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제원은 남명 조식을 비롯해 성운(成運), 서경덕, 이지함 등 당대의 문인들과 친교를 맺었다. 1557년, 조식은 친구인 성운(成運)을 만나기 위해 보은으로 향했다. 성운은 형이 을사사화로 화를 입자 속리산으로 내려가 은거하고 있었는데, 그 후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성운을 만나기 위해 보은으로 간 조식은 당시 보은현감으로 있던 성제원을 처음 만났다. 이들은 서로 통하는 바가 있어 처음 만났는데도 곧바로 친구가 되었다. 그리하여 조식, 성제원, 성운은 속리산 계곡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어 읊었다. 이윽고 조식이 속리산을 떠나려 하자 성제원이 술자리를 베풀어주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그대와 내가 모두 중늙은이가 되어 멀리 떨어진 고을에 살고 있으니 어찌 다시 만나기를 기약할꼬?" 그들은 못내 아쉬운 듯 이듬해 추석에 합천 가야산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그때가 되면 성제원의 임기가 끝나므로 고향으로 가는 길에 가야산에서 조식을 만나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듬해 추석이 다가오자 조식은 1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합천 해인사로 떠나려 하였다. 마침 큰 비가 내리고 있었으므로 여러 제자와 가족들이 만류하고 나섰다. 하지만 조식은 장대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났다.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꼬박 이틀을 걸어 해인사에 도착했다. 성제원도 1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해인사에 도착해 있었다. 그 역시 빗속을 뚫고 보은에서 합천까지 6백 리 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조식(曺植)은 영남에서 퇴계와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로 중종, 명종, 선조때까지 삼조(三朝)에서 여러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힘써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文貞)의 시호를 내렸다. 벼슬을 내리는 조정의 부름에는 응하지 않은 그가 뜻이 통하는 친구와의 약속(의리)만은 꼭 지킨 것이다. 성제원이 일찍이 전국의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청주에 들른 적이 있었다. 당시 청주목사가 그의 친구였는데, 친구가 찾아오자 기생 춘절(春節)을 불러 모시도록 했다. 성제원은 기생과 함께 산을 찾아다니며 놀았는데,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서도 한 번도 기생을 범하지 않았다. 그는 산을 돌아다니면서 산수가 맑고 좋은 곳이면 곧 그림으로 그리거나 시를 지어 화폭에 썼는데, 산을 나올 때는 그림이 수십 폭에 이르렀다. 성제원은 마침내 청주를 떠나면서 기생에게 말했다. "내가 너를 범하지는 않았으나 다른 사람들은 반드시 나와 동침을 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관리들이 너를 가까이하지 않을 것이고, 기생으로서 손님이 없으면 생계를 잇기도 힘들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동안 그렸던 화폭을 줄 터이니 사람들이 찾아오거든 이 화폭을 보이거라. 그러면 나를 잊지 않은 이가 너를 돌보아 줄 것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쟁이 끝난 후 성제원을 잘 아는 감찰사(監察使) 아무개가 청주목사와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 감찰사는 성제원 형의 손자였다. 한참 흥에 겨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옆에 있던 사람이 말하였다. "그 기생이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목사가 그 기생을 불러오라고 했다. 하지만 기생은 이미 여든 살이 넘어 있었다. 감찰사가 성제원의 친척임을 알게 된 기생은 그의 손을 잡고 울며 말하였다. "오늘 그분의 손자를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비록 그분과 잠자리를 하지는 않았지만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날 이후 쇤네는 절개를 지키며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때 주신 화폭을 첩으로 만들어 이 고을을 지나는 선비들에게 보여주니 후히 대접해주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왜란 중에 그 화첩을 잃었으니 참으로 분한 일입니다."
성제원(成悌元) 1506년(연산군 12) ~ 1559년(명종 14).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휘는 제원(悌元), 자는 자경(子敬), 호는 동주(東洲) 또는 소선(笑仙)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즐겨 유우(柳藕)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리학을 비롯한 각종 학문에 정통하였다. 젊어서부터 전국을 방랑하며 벗들과 어울려 시를 짓고, 세속에 구애됨 없이 초야에 묻혀 살았다. 만년에 보은 현감에 천거되어 나갔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그때 보은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길을 가로막았다고 한다. 이후 공주의 향리에 돌아와 은거하였다. 54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저서로 『동주유고(東洲遺稿)』가 있으며, 시호는 청헌(淸憲)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