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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기고=김남영] 세상사는 이야기-196

기억의 고고학, 그리고 실존적 화해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7월 21일
 
< 김남영 / 동두천노인대학 학장 >
 
​인간은 단순히 흐르는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기억이라는 날줄과 씨줄을 엮어 '자기'라는 서사를 구축해 나가는 실존적 존재입니다. 일찍이 수많은 철학자는 인간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 생의 표면에 드러난 거대하고 화려한 사건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의식의 가장 깊고 낮은 곳, 즉 내면의 심연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는 작고 사소한 기억의 파편들이야말로 인간의 존재론적 기반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구적 이성과 바쁜 일상의 속도에 치여, 이 소중한 내면의 궤적을 망각한 채 타인과 세상이 규정한 가치만을 쫓으며 살아갑니다.

​삶의 연륜이 더해질수록 우리는 묘한 역설에 직면합니다. 인간의 의식은 이상하게도 충만했던 존재의 순간보다, 결핍과 후회, 그리고 상처의 기억을 먼저 길어 올리곤 합니다. 실패의 트라우마는 어제 일처럼 선명한 지향성을 갖는 반면, 누군가의 실존에 맑은 미소를 피워내던 순간이나 타자의 고통을 감싸 안던 숭고한 연대의 기억은 너무나 쉽게 망각의 심연으로 밀어 넣습니다. 부정적인 기억에 스스로를 구속하는 것, 이는 어쩌면 우리 영혼이 앓고 있는 가장 고질적인 '존재론적 왜곡'일지도 모릅니다.

​생의 후반전을 걸어가는 이에게 진정으로 요청되는 것은 눈앞의 새로운 사회적 성취나 세속적인 성공이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염되고 파편화된 ‘기억의 질서’를 복원하는 일, 즉 내면의 역사학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소외시켜 두었던 마음의 방에 들어가 기억의 먼지를 털어내 봅니다. 그곳에는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마주하는 삶의 본질적 풍경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해 질 녘 골목길을 채우던 흙먼지의 냄새, 말없는 시선으로 존재를 긍정해 주시던 부모님의 깊은 눈빛, 타자와의 순수한 공명을 나누던 친구와의 시간, 그리고 소박한 식탁 위를 흐르던 평범한 온기들. 그토록 작고 덧없어 보이던 순간들이야말로, 실존의 위기 속에서 흔들리는 나를 지탱하고 끝내 '지금-여기'라는 대지 위에 뿌리내리게 해 준 삶의 진짜 형이상학적 근원이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동서양의 철학자들은 행복이란 초월적인 이상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실존적 풍요를 자각하는 인식의 능력’이라 말했습니다. 삶이란 더 많은 소유를 위해 세계와 투쟁하는 전장이 아니라, 내가 이미 구비하고 있는 존재론적 가치들의 빛나는 의미를 하나씩 '재발견'해 나가는 구도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상자를 열었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마주하고 환대해야 할 대상은 타자가 아닙니다. 수없이 분열하고 부서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내 오늘이라는 삶의 문턱을 묵묵히 걸어온 ‘자기 자신’입니다. 상처투성이가 된 자신을 보듬으며 "참 애썼다, 고맙다"라고 나직이 속삭이는 행위야말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나누는 가장 아름다운 실존적 화해(Reconciliation)입니다.

​인생의 후반전은 상실된 젊음을 애도하며 과거를 모방하는 유령의 시간이 아닙니다. 내면에 침전되어 있던 고유한 자아를 회복하고, 온전히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서랍 속 기억들을 따스한 이성의 햇볕 아래 꺼내어 말릴 줄 아는 인간은 결코 과거라는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의 지평을 토대로 오늘을 버텨내고, 내일이라는 미래의 지평을 향해 전진하는 지혜로운 주체입니다.

​따라서 기억을 소환하는 행위는 단순히 감상적인 추억을 수집하는 소박한 취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미건조한 일상성 속에서 소외되었던 나를 구원하고, 삶의 참된 의미를 재구성하는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면서도 위대한 ‘철학적 존재' 입니다.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길목에서, 이제 오래된 마음속 상자를 열어 진짜 나를 마주해 위로해 주어야 할 시간입니다.

< 김남영 / 동두천노인대학 학장 >

* 칼럼 및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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