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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걸 / 수필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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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벼락을 타고 오른 능소화가 칠월의 볕을 머금고 환하게 피어 있었다. 꽃은 제 삶의 경계인 담을 넘어서며 비로소 더 아름다워지는 중이었다. 강원대학교 경영대학원 대학원 동기들과 10주년 기념 여행을 떠나는 아침, 돌아보니 십 년이라는 시간도 저 능소화처럼 어느새 익숙한 담장을 넘어 우리 곁에 와 있었다. 사람들은 여행을 몸으로 하는 독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번 여정은 단순히 풍경을 보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삶이라는 책을 깊이 읽어 내려가는 시간이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작은 소식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가벼운 안부로 시작된 이야기는 말의 결을 따라 어느새 삶의 가장 깊고 은밀한 자리까지 가닿았다.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을 견뎌내야 했던 기억, 배움을 향해 강원 영월의 험준한 산과 들을 매일 같이 걸어 넘었던 젊은 날의 고단한 발걸음, 그리고 가슴 한편에 묻어둔 풋풋한 첫사랑의 추억까지. 십 년 전, 같은 강의실에서 지식을 나누었으나 우리는 그날 비로소 서로의 진짜 삶과 대면했다. 사람은 이름 석 자보다 그가 품은 이야기로 먼저 기억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평창으로 향하는 길목은 칠월의 초록으로 짙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가산(可山) 이효석의 생가를 거닐며 문학이란 결국 타인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소설 속 메밀꽃은 아직 피지 않았으나, 동행들의 이야기를 품은 내 마음속에는 이미 하얀 꽃밭이 눈부시게 일렁이고 있었다. 마주 앉아 나누어 먹은 메밀막국수 한 그릇에도 강원의 청량한 바람이 고스란히 얹혀 있었다.
해 질 무렵 당도한 산골 펜션의 마당에는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따뜻한 음식을 나누고 서먹함을 지워내는 놀이 속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모두가 나이와 직함을 잊은 채 동심으로 돌아갔다. 그중에서도 연신 노래 ‘평행선’을 외치던 한 대학원 동기의 모습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유쾌한 잔상을 남겼다. 결코 만나지 못하고 평행하게 달리는 선을 노래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긴밀하게 엉켜 있었다.
뒤이어 강원도 아리랑을 구수하게 부르던 이 회장님의 목소리까지 더해지니, 인생은 결코 수학이 아님을 실감했다. 서로 다른 궤적을 그려온 삶들이 한순간 같은 멜로디에 기대어 목소리를 모으는 일, 그것이야말로 인연이라는 신비였다. 이윽고 모닥불은 붉은 재가 되었지만, 사람의 온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 눈앞의 불꽃은 이내 사그라졌을지언정, 함께 나눈 시간의 온도는 마음의 아궁이 속에서 오래도록 타오를 것이다.
돌아오는 길, 버스 창밖으로 능소화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떠날 때 보았던 바로 그 꽃이었으나, 이제 내 눈에는 전혀 다른 꽃으로 읽혔다. 떠날 때는 계절의 변화를 보았고, 돌아오는 길에는 그 꽃에서 사람의 얼굴을 보았던 까닭이다.
경영대학원에 처음 입학했을 때 내 목적은 명료했다. 시대의 최전선에 있는 최고의 지식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십 년의 세월을 관통하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람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박제된 지식이 아니라, 결국 온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누군가의 작은 기쁨에 제 일처럼 함께 웃어주고, 누군가의 깊은 아픔에 말없이 자기 마음의 한 자락을 얹어 주는 사람. 오래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가 걸어온 고유한 시간을 존중하고 이해해 주는 사람. 그런 이들이야말로 내 삶의 지평을 조금씩 더 깊고 넓게 확장해 준 은인들이었다.
능소화는 제 울타리를 넘어 피어날 때 가장 눈부시다. 사람의 인연도 그러할 것이다. 학교라는 자그마한 울타리에서 시작된 만남은 세월을 건너 이제 서로의 고단한 삶이 온전히 기대어 쉴 수 있는 넉넉한 그늘이 되었다.
버스가 천천히 멈춰 서고 모두가 각자의 일상이라는 행선지로 돌아갔다. 이로써 여정은 끝이 났지만, 우리의 동행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세상 그 어떤 절경보다 귀하고 눈부신 것을 얻었다.
"내 생에 가장 찬란한 사람들을 얻었다."
◀ 작가 김종걸 ▶ ○ 격 월간지《그린에세이》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원.
○ 수필집 “울어도 괜찮아”(2024), “언론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명수필”(2022,공저)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수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 공모전 우수상 수상.(2021) 제6회 대한민국 다문화 인권문학상 공모전 동상 수상.(2025)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 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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