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김종걸 / 수필작가 >
|
| 여름의 초입이었다. 장마가 들기 전 하늘은 높고 맑았으며, 햇살은 아직 견딜 만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계절은 늘 그렇듯 소란 없이 곁에 와 있었고, 창문 너머 나무들은 어느새 짙어진 초록으로 제 몸을 넓혀 가고 있었다. 책상 위 서류를 정리하다가 빛바랜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오래 잊고 지냈다고 믿었던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능지울.” 손끝에 닿은 것은 종이였지만, 되살아난 것은 시간이었다. 순간 오래전 여름의 냄새와 뜨거운 공기가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 올라왔다. 기억은 완강했고, 내 안의 걸음은 이미 십 년 전 그 여름의 고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향 초입의 함벽정 호수는 거대한 초록의 숨처럼 웅크려 있었다. 폭염을 견딘 수풀은 짙게 우거졌고, 매미 소리는 숲 전체를 흔들 만큼 집요했다. 수면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으나, 아래에는 오래 가라앉은 시간의 그림자가 숨어 있는 듯했다. 물결이 간간이 빛을 튕겨 낼 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그리움 앞에서 서성였다. 발길을 돌려 찾은 모교 왕북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여름의 열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글거리는 아지랑이 너머로 친구들과 뛰놀던 오후가 신기루처럼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고향은 다정한 안식처라기보다, 오래 묻어 둔 기억이 날 것 그대로 비추는 거울에 가까웠다. 그 무렵 어머니께서는 생의 가장 가파른 계절을 지나고 계셨다. 그날도 천천히 눈을 뜨신 어머니는 마른 입술 끝으로 희미하게 웃으셨다. 그 미소 하나가 방 안의 적막을 조금씩 밀어냈다.
식사 후 손톱을 깎아 드리려고 어머니의 손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순간 손이 아니라 오래된 땅을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봄이면 산나물을 뜯고, 여름이면 밭고랑을 매고, 겨울이면 얼어붙은 흙을 호미 끝으로 깨며 자식 셋을 키워 낸 손. 손바닥의 갈라진 결은 마른 논바닥 같았고, 불거진 힘줄은 가뭄 끝에 드러난 뿌리를 닮아 있었다. 단단하게 굳은 손톱 끝을 누를 때마다 툭, 툭, 메마른 소리가 났다.
그것은 무언가 잘려 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어머니가 홀로 견뎌온 시간이 꺾이고 접히는 소리였다. 어머니께서는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계셨다. 흘러가는 구름을 따라 시선이 멀어졌다. 그 침묵 속에서 문득 알았다. 사람이 한평생 살아낸다는 것은 결국 제 몸으로 누군가의 뿌리가 되어 주는 일이라는 것을.
이튿날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자주 오르던 응달산 초입에 들어섰다. 장마 뒤 산길은 축축했고 길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길가에 드러난 소나무 뿌리들은 거칠고 단단했다. 그 모습이 신기하게도 아버지의 거친 손등과 닮아 있었다. 숲속에서는 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눈앞의 잎과 줄기만 가득했다. 그러나 몇 걸음 물러서자 비로소 하나의 나무가 온전히 드러났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부모의 시간도, 사랑도, 고향도 그렇다. 멀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온전한 형상을 얻는다.
도시로 돌아온 뒤에도 함벽정의 물 냄새는 문득문득 되살아났다. 건널목 앞 신호를 기다릴 때면 응달산의 바람이 회색 빌딩 사이를 지나가는 듯했다. 속도와 효율이 미덕이 된 도시에서 나는 자꾸만 어머니의 더딘 걸음과 아버지의 긴 침묵을 떠올렸다. 삶의 중요한 것들은 대개 느린 것들 속에서 자란다는 사실도 그때 조금씩 배웠다. 세월이 흐를수록 내 안에는 고향의 흙냄새와 부모의 체온이 더 선명해진다.
오래전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 길은 지나간 시간을 향한 단순한 귀향이 아니었다. 문명의 거죽을 벗고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확인하러 가는 길이었다. 사람은 앞으로 걸어가지만, 삶은 때때로 우리를 뿌리 쪽으로 자라게 한다.
오늘도 저녁 빛이 도시의 유리 벽 위로 번진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아직도 응달산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안다. 내가 오늘을 살아내는 힘은 멀리 있는 미래가 아니라, 오래전 내 등을 밀어주었던 그 흙 속에서 지금도 조용히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그 흙의 이름을 나는 안다.
“능지울.” 지금은 지도 위의 지명이 아니라, 내가 끝내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할 마음의 고향이다.
◀ 작가 김종걸 ▶ ○ 격 월간지《그린에세이》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원.
○ 수필집 “울어도 괜찮아”(2024), “언론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명수필”(2022,공저)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수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 공모전 우수상 수상.(2021) 제6회 대한민국 다문화 인권문학상 공모전 동상 수상.(2025)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 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