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근(대진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요즈음 일간신문과 인터넷을 가득 채우는 사건은 단연코 김영호 전 성균관대 교수의 석궁사건이다. 보수신문에서는 ꡐ석궁테러ꡑ로 보고, 젊은 진보층에서는 ꡐ석궁의거ꡑ라며 서로 대조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다.
김 교수는 성균관대 입시 수학문제 한 문항이 잘못되었다고 양심선언을 하였다는 이유로 동료교수들에게 소외되고 심지어 해임을 당하는 희생양이 되었다. 학자는 자신의 전공영역의 문제가 잘못되어서 일부 학생이 불이익을 당했다면 학자로서 당연히 시시비비를 가려서 정의가 바로 서게 해야 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김 교수는 자신의 양심선언에 의해서 해임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사법부에서 밝혀주기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사법부는 입시문제는 김 교수가 지적한대로 잘못되었지만 그의 교육자적 자질이 불량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징계가 옳다는 판결을 내렸다. 보통 사람들은 잘 납득이 가지 않는 역설적인 판결이다. 김 교수가 자신의 신분을 위협 당할 수 있는 엄청난 사건에 대해서 다수의 교수들과 학교당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양심선언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사실이라고 밝히면서 그의 교육자적 자질이 수준 이하라고 판결했다면 그 것이 옳은가 그른가는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수학시험문제가 잘못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다수의 교수가 교육자적 자질이 있는가. 아니면 양심은 바른데 일부 언행이 거친 교수에게 교육자 자질을 운운하는 것이 최고의 정의를 지켜주어야 할 사법부 판사가 할 일인가. 그 정도로 판사들의 판단력이 흐리단 말인가. 그래서 많은 네티즌들이 ꡐ석궁의거ꡑ라고 들고 있어나고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사람의 죄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햄릿』이다. 이 작품에서 죄의 원천은 햄릿의 삼촌인 클라이우디스이다. 그는 권력에 눈이 어두워 형인 햄릿왕을 독살하고 형수를 아내로 취한다. 성경에서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써 신이 용서할 수 없는 친족살해를 범했듯이 형을 죽인 것이다. 거기다가 기독교 십계명에 지적되었듯이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죄도 함께 범하여 이중의 큰 죄를 범하고 만 것이다. 햄릿은 아버지의 유령을 만나 자신이 죽게 된 자초지종을 들었지만 확증을 잡지 못해 복수를 지연하며 때만 기다리며 광인의 연기를 지속한다. 햄릿의 광증의 진위를 의심스러워하는 클리우디우스는 햄릿의 죽마고우인 로젠크랜츠와 길덴스텐을 불러들여 햄릿의 속마음을 떠보라고 사주한다. 심지어는 햄릿의 애인인 오필리어를 이용해서 그가 진짜 미쳤는지 아니면 미친 척 하는 것인지 알아보라고 채근한다.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권력에 대한 최대의 경쟁자이자 위협자인 햄릿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햄릿의 우정과 사랑을 정략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클리우디우스는 햄릿이 그의 죄의 진실을 향해서 조금씩 접근해오자 점점 불안해진다. 권력과 색정이 눈을 가려서 전혀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던 그가 불안해지고 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햄릿을 아예 죽일 수 있는 방도를 찾는다. 햄릿을 영국으로 보내어 영국 왕으로 하여금 죽이도록 하는 암수를 생각해낸다. 하지만 그는 죄의식의 작은 물줄기가 가슴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는 아무도 없는 곳에 ꡒ아, 이 죄악, 악취가 하늘까지 찌르는구나. 인류 최초의 저주를 받으렷다, 형제를 죽인 죄로! 기도도 드릴 수 없구나, 심정만은 간절한데, 기도하고 싶은 마음은 강하나 더욱 강한 죄악에 압도당하고 양다리를 걸친 사람모양 어디부터 시작할지 망설이다가, 양쪽 다 못하고 마는 격이다. 설사 이 저주받은 손목이 형의 피로 두꺼워졌다 할지라도 하늘에는 이 손을 백설처럼 희게 씻어 줄 단비는 없을까.ꡓ 죄지은 사람은 아무리 권력과 금력이 가득 하더라도 죄의 가시가 양심의 심장을 찌르는 한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죄를 가리고 싶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천국에서 내려 비치는 진실의 강한 빛을 막을 수 없다. 그 빛은 가슴속의 시커먼 치부를 드러내어 자신의 존재의 초라함을 드러내주고 만다. 그러기에 클라우디우스는 한사코 자신의 죄를 지적하려고 하는 햄릿을 제거하고 한다. 그 것이 바로 그의 도덕적 한계이다. 죄나 양심은 불가시적인 내적인 영역인데, 햄릿이라는 현상적 존재의 제거함으로써 그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이다.
그는 입 발린 회개를 하려고 노력하지만 죄의 무게로 마음의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그에게 기도가 나올 리 없다. 기도란 그의 양심의 문이 활짝 열려있어 자신의 잘못을 회개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단지 지옥의 불이 두려워 회개는 뒤로 미룬 채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클라우디우스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다. 그는 결국 자신의 현주소를 깨닫는다. ꡒ이 말세의 탁류 속에서는 범죄의 손도 황금으로 도금을 하면 정의를 밀어젖히고 부정한 수단으로 얻은 바로 그 금력으로 국법을 매수하는 것 쯤 식은 죽 먹기지, 하지만 이건 천상에서 통하지 않지. 글쎄 하느님 앞에서는 속임수는 통하지 않고, 죄상은 그 본채를 드러내고, 그리고 죄상에 대해 일일이 증거를 대며 실토할 수밖에 없으니까.ꡓ
김영호 교수는 양심선언으로 교수의 실수를 인정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백하지 못하는 학교당국이나 그들의 해임을 인정하는 사법부는 클라우디우스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석궁은 결코 비겁한 판사를 죽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양심의 문을 열라고 두드리는 신의 소리일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