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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걸 / 수필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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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공기는 아직 차다. 창문을 여는 순간, 폐부 깊숙이 스며든 냉기가 오래 묻어둔 이름 하나를 건드린다. “능지울.”그 이름을 불러본다. 능지울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다. 유년이 켜켜이 쌓인 자리이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해 주는 곳이다.
눈을 감으면 계절이 먼저 떠오른다. 앞다투어 피던 꽃들, 마을을 감싸던 녹음, 가을이면 타오르던 단풍, 모든 소리를 덮던 설경. 초가 사이로 기와지붕이 늘어가고, 가끔 들어선 양옥집은 마을의 자랑이었다. 고샅길에는 아이들의 웃음이 굴러다녔다. 담 너머로 들리던 아기 울음은 마을이 살아 있다는 신호였다. 부모님은 거친 들일로 손마디가 굵어졌지만, 저녁이면 자식들 곁에서 피로를 잊으셨다. 마을 어귀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삼백 명 남짓한 아이들이 뛰놀았다. 흙먼지가 이는 만큼 꿈도 함께 일었다.
한여름의 무더위조차 우리에겐 핑계였다. 개울로 달려가 물속에 몸을 던지고, 서툰 헤엄과 장난에 해가 기우는 줄도 몰랐다. 들일을 마친 부모님과 마루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을 즈음이면 세상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밤이 깊으면 마당에는 모깃불이 피어올랐다. 할머니가 펴주신 멍석 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면 은하수가 길처럼 놓여 있었다.
별들은 셀 수 없이 많았고, 논두렁의 개구리 울음소리는 자장가가 되었다. 부채 바람이 이마를 스치면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 밤들 중 하루, 나는 할머니에게 물은 적이 있다. “저 별은 왜 안 떨어져요?” 할머니는 한참 하늘을 바라보시더니 낮게 웃으셨다. “사람이 지키고 있어서 그렇지.” 그때의 나는 별은 원래 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다.
얼마 전, 그 시간을 더듬어 능지울을 찾았다. 그러나 마을은 예전과 달랐다. 빈집이 늘었으며, 골목길에는 아이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붐비던 학교는 겨우 명맥만 이어가고 있었다. 마을에는 젊은이들은 떠났고, 어르신께서 지키고 있었다. 오래 갈리지 않은 밭에는 잡풀이 무성했다. 논과 밭의 경계도 흐려졌다. 사람이 비워 둔 자리에는 한해살이풀이 먼저 뿌리를 내렸다.
기울어가는 추녀 아래에서 쑥부쟁이와 개망초가 계절을 대신하고 있었다. 푸른 기운은 남아 있었지만 빛은 예전과 달랐다. 마지막 어르신들마저 떠나면 이곳은 언젠가 지도 위의 이름으로만 남을지도 모른다. 퇴직 후 고향으로 돌아가 살아보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시간은 예상과 다르게 흘렀다. 능지울이 사라진다 해도 그곳에서 보낸 시간까지 지워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을 기억할 사람은 점점 줄어들 뿐이다.
오늘 밤, 베란다에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별은 많지 않다. 도심의 불빛이 하늘을 희미하게 덮고 있다. 그래도 몇 개의 빛은 남아 있다. 한동안 그 빛을 바라본다. 오래전 멍석 위에 누워 듣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문득 겹친다. 창문을 닫으며, 나는 속으로 한 번 더 능지울을 불러본다.
◀ 작가 김종걸 ▶ ○ 격 월간지《그린에세이》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원.
○ 수필집 “울어도 괜찮아”(2024), “언론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명수필”(2022,공저)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수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 공모전 우수상 수상.(2021) 제6회 대한민국 다문화 인권문학상 공모전 동상 수상.(2025)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 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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