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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걸의 플러스에세이 27] 지워진 이름의 자리에서

- 영월 자규루에서 백촌(白村)을 복기하다 -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4월 27일
< 김종걸 / 수필작가 >

완연한 봄이었다. 겨우내 움츠렸던 산자락이 연둣빛 기지개를 켜고, 바람은 오래 묵은 기억의 먼지를 털어내듯 부드러웠다. 한국수필가협회 지인들과 함께 향한 곳은 강원도 영월. 단종문화제가 한창인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단순한 나들이라기보다 역사라는 거대한 텍스트 속에서 아직 다 불리지 못한 한 문장을 찾아가는 여정에 가까웠다.

여정은 김삿갓문학관을 거쳐 축제의 흥취가 넘실거리는 동강 둔치로 이어졌다. 이어 발길이 멈춘 곳은 관풍헌 앞. 세월의 결을 고스란히 품은 목조 건물 곁에 자규루가 호젓이 서 있었다. 단종이 유배 시절, 피를 토하듯 운다는 소쩍새의 울음에 자신의 운명을 투영하던 곳. 본래 매죽루였던 이름이 자규루로 바뀐 내력을 되짚어보니, 이름 하나에 깃든 비애가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 내 어깨 위로 내려앉는 듯했다. 슬픔은 때로 장소의 이름마저 바꾸어 놓는다.

숙연한 공기가 감도는 장릉에 이르렀을 때, 단종에게 충절을 바친 신하들을 기리기 위하여 설치한 제단(배식단) 앞에서 나는 한 장의 전단지를 집어 들었다. 축제의 활기 속에서 무심코 전단지를 본 순간 나는 길을 잃었다. 전단지에 사육신의 이름을 열거한 목록 어디에도 내가 가슴에 품어온 이름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충의공 김문기.”그 순간, 종이 위에서 사라진 이름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시 죽는 소리를 나는 분명히 들었다. 내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지워진 이름 하나가 그림자처럼 서성이고 있는데, 기록의 활자는 냉담하기만 했다.
 
역사는 때로 침묵으로 사람을 지운다. 종이에 적히지 않은 삶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바람은 여전히 따뜻했으나, 지워진 이름을 쥔 손끝부터 서늘한 한기가 스며올랐다. 기록되지 못한 진실은 누군가의 가슴 속에서만 겨우 숨을 쉰다.

백촌 김문기 선조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단종을 향한 충절을 온몸으로 증명한 인물이다. 세종과 문종의 신임을 받으며 곧고 단정한 삶을 살았던 그는 권세가 아니라 신념의 궤적을 따랐다. 1456년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살점이 찢기는 고문 속에서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후대는 그를 문과 무를 겸비한 인물로 평했지만, 내게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그 고독한 단단함이다.

그러나 역사의 저울은 늘 공정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오랜 세월 사육신의 목록에서 누락되었고, 충절은 권력의 그림자에 가려졌다. 정조 대에 이르러 삼중신으로 바로 세워지고, 숙종과 영조를 거치며 복권과 시호를 받았으나, 대중의 기억 속으로 스며드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증을 통해 비로소 사육신으로 공식 인정되었음에도, 현장의 전단지는 여전히 과거의 관성에 머물러 있었다. 지워졌던 이름이 제자리를 찾는 데는 오백 년이 걸렸다. 그러나 그 이름을 온전히 지켜내는 데는, 그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미 바로잡힌 역사가 왜 이 유서 깊은 영월의 제단(배식단) 앞에서 여전히 흐릿하게 남아 있는 것일까.
 
역사는 박제된 과거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해석되고 기록되는 살아 있는 흐름이다. 특히 단종문화제처럼 전국적인 위상을 지닌 자리라면, 그 기록의 무게는 더욱 엄정해야 한다. 한 줄의 누락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다시 유배 보내는 일이다. 이름은 존재의 집이라는데 집을 잃은 영혼은 어디에서 쉬어야 하는가.

문득 자규의 울음이 떠오른다. 슬픔의 울음조차 누각의 이름으로 남았거늘, 목숨으로 지켜낸 충절의 이름은 왜 여전히 인색한 활자 뒤에 숨어 있어야 하는가. 축제의 소음 속에 묻힌 진실의 목소리를 듣는 일, 어쩌면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몫일 것이다.

꽃이 피고 지는 계절처럼 기억은 흐려진다. 그러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화려한 조명이 아니라, 그 이면을 지탱하는 진실의 뼈대다. 영월의 하늘은 맑았고 동강은 쉼 없이 흘렀다. 그 물길처럼 역사는 흘러가겠지만, 우리가 바로잡지 않은 물줄기는 끝내 왜곡된 바다로 이어진다. 흐르지 못하고 고인 역사는 결국 썩는다.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곧 역사를 지키는 일이다. 단종의 슬픔이 서린 영월의 산천에서, 나는 한 충신의 잊힌 이름을 통해 역사의 서늘함을 배웠다. 언젠가 다시 펼칠 안내 책자의 첫 페이지에 ‘충의공 김문기’라는 이름이 빠짐없이, 그리고 또렷하게 새겨져 있기를 바란다.

그날이 오면, 봄은 조금 더 따뜻해질 것이다. 지워진 이름 위로 새순이 돋고, 오래 눌린 침묵이 비로소 빛을 얻는 날. 영월의 바람이 내게 속삭였다.잊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고.

2026년 4월 25일 한국문인협회 수필의 날 심포즈엄을 다녀와서

◀ 작가 김종걸 ▶
○ 격 월간지《그린에세이》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원.

○ 수필집
“울어도 괜찮아”(2024),
“언론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명수필”(2022,공저)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수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 공모전 우수상 수상.(2021)
제6회 대한민국 다문화 인권문학상 공모전 동상 수상.(2025)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 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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