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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걸 / 수필작가 > |
| 1. 억겁의 기다림, 벚꽃 터널을 지나며 계절은 어김없이 순환하여 우리 곁에 당도했다. 2개월 전, 단톡방에서 오갔던 설렘 가득한 약속들이 오늘 드디어 현실의 공기가 되어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2026년 4월 11일 토요일. 한국사법교육원 화성 시민로스쿨 3기 원우님들과 함께하는 홍성 여행은 시작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빛깔이었다. 기차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온통 연분홍빛 벚꽃과 샛노란 개나리의 향연이었다. 마치 누군가 세상의 명도를 한껏 높여놓은 듯, 홍성의 길목마다 꽃의 파동이 일렁였다. 여행 공지를 읽고 나서 기다림의 시간은 지루하기보다 오히려 숙성된 설렘에 가까웠다. 법(法)이라는 차가운 학문을 함께 공부하며 인연을 맺은 우리가 이토록 따스한 봄의 한복판에서 우연히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몽글몽글해졌다.
2. 홍주읍성, 역사의 숨결을 걷다 우리의 첫 발걸음은 홍성의 심장부인 홍주읍성으로 향했다. 성벽을 따라 걷는 길 위로 봄바람이 살랑이며 꽃잎을 흩뿌렸다. 천년의 세월을 견뎌온 성곽은 묵직한 존재감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법을 배우는 이들에게 역사는 가장 큰 스승이다." 누군가 던진 한마디에 우리는 숙연해졌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조양문과 홍주아문은 과거의 영광과 상처를 동시에 증언하고 있었다. 성벽 틈새마다 피어난 이름 모를 풀꽃들은 모진 풍파를 견디고 살아남은 백성의 끈질긴 생명력을 닮아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단순히 경치를 감상하는 관광객이 아니라, 역사의 층위(層位)를 탐독하는 관찰자가 되었다.
3. 천주교 성지순례, 침묵 속의 대화 홍주읍성 일대는 단순한 유적지를 넘어,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피가 서린 천주교 순례지이기도 하다. 홍주옥터와 순교 터를 지나며 대화는 자연스레 잦아들었다. 종교를 떠나, 한 인간이 자신의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감내했을 고통과 고독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순교자들이 흘린 피는 이제 거름이 되어 성지 곳곳에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 것일까. 침묵 속의 순례는 시끄러웠던 마음을 정화해 주었다. 화성 시민로스쿨 3기 원우로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의와 양심의 무게가 절대 가볍지 않음을, 홍성의 붉은 땅은 소리 없이 웅변하고 있었다.
4. 홍성 장날, 삶의 활력이 요동치는 곳 엄숙했던 순례를 마치고 도착한 홍성 전통시장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운 좋게도 장날과 겹쳐 시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투박한 사투리가 오가고, 갓 수확한 나물들의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이것이 진짜 '사람 사는 냄새'였다. 우리는 미리 점찍어둔 시장 안 국밥집에 자리를 잡았다. 커다란 가마솥에서 김을 모락모락 내뿜으며 끓고 있는 국밥은 홍성의 인심 그 자체였다. 뜨끈한 국물 한 숟갈에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지만 “이 맛에 여행 오는 거 아닙니까!" 원우 한 명이 소리 높여 건배사를 외치자, 식당 안은 웃음꽃으로 가득 찼다. 격식을 차린 식당보다 시장통 국밥집이 우리에게 더 잘 어울렸던 이유는, 우리가 법을 공부하는 이유 또한 결국 이 평범하고도 위대한 이웃들의 삶을 지키기 위함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5. 식물원의 정원, 초록의 위로 오후 일정은 싱그러운 식물원 관람으로 이어졌다. 인위적으로 가꾸어진 듯하면서도 자연의 본성을 잃지 않은 식물들의 자태는 경이로웠다. 온실 안에는 세상의 계절을 잊은 열대 식물들이 저마다의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고, 야외 정원에는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린 봄꽃들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원우님들과 함께 봄 길을 걸으며 나눈 대화는 주제를 가리지 않았다. 어려운 세상의 법 이야기부터 소소한 일상의 고민까지, 초록의 공간 안에서 우리의 마음은 한층 더 투명해졌다. 식물들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조화롭게 숲을 이루듯, 우리 화성시민로스쿨 3기 또한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며 하나의 공동체로 거듭나고 있음을 느꼈다.
6. 다시 일상으로, 마음속에 심은 꽃 한 송이 해가 질 녘, 돌아오는 기차 안은 출발할 때와는 또 다른 공기가 감돌았다. 피곤함보다는 충만함이 앞서는 시간이었다. 홍성이라는 낯선 도시가 이제는 '우리'라는 추억이 덧입혀져 정겨운 공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번 여행은 단순한 친목 도모를 넘어, 한국사법교육원 화성시민로스쿨 3기라는 이름 아래 묶인 우리가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는 의식(儀式)과도 같았다. 법전(法典) 속의 문구는 차갑지만,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의 가슴은 이토록 따뜻해야 한다는 것을 홍성의 벚꽃과 국밥, 그리고 성지의 침묵이 가르쳐주었다.
내일이면 다시 각자의 일터에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우리 마음 한구석에는 오늘 홍성에서 연분홍 벚꽃과 노란 개나리, 그리고 원우님들의 웃음소리가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남을 것이다. 봄은 짧지만, 그 봄에 맺은 인연은 사계절 내내 푸르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함께해준 화성시민로스쿨 3기 원우님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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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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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김종걸 ▶ ○ 격 월간지《그린에세이》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원.
○ 수필집 “울어도 괜찮아”(2024), “언론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명수필”(2022,공저)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수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 공모전 우수상 수상.(2021) 제6회 대한민국 다문화 인권문학상 공모전 동상 수상.(2025)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 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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