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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걸의 플러스에세이 25] 수선화의 숨결 속에서

-우리의 곁을 지켜주는 사람 들과 함께-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4월 09일
ⓒ 포천신문

봄은 소리보다 먼저 색으로 온다. 겨울의 가장자리를 조금씩 녹이며 어느 날 마음 한편이 밝아졌다고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봄을 알아차린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 백 년의 세월을 품은 유기방가옥에서 나는 그런 봄을 만났다. 담장 너머로 일렁이던 노란 수선화의 물결이 겨울 끝자락에 머물러 있던 마음을 조용히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대문을 지나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숲 그늘에 피어난 수선화들이 햇살을 머금고 작은 등불처럼 반짝인다. 장독대와 기와 담장 사이를 가득 채운 노란 꽃들은 투박한 황토벽과 어우러져 오래된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고택의 깊은 결 위로 해마다 새로운 봄이 겹겹이 내려앉는다. 멈춰 선 시간과 흐르는 계절이 이곳에서 조용히 마주한다.

사진 한 장으로는 이 풍경을 다 담아낼 수 없다. 발밑에서 부드럽게 부서지는 흙의 감촉, 꽃향기를 머금은 공기, 그리고 소나무 숲 사이로 흐르는 바람까지.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하나의 계절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숨결을 천천히 들이마신다. 꽃의 잔향을 안고 발걸음은 인지면으로 이어졌다. 식사를 마친 뒤 찾은 곳은 ‘서산의 알프스’라 불리는 서산 한우목장 산책로였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길이 다시 열리며 이제는 누구나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되었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덱길을 따라 걷다 보면 푸른 초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계단 하나 없는 길 위에서 자연은 누구에게도 경계를 두지 않는다. 휠체어도 유모차도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길을 나아간다. 초원을 스치는 바람이 수선화밭에서 가져온 봄의 온기를 부드럽게 식혀 준다.

여행의 마지막은 조선 시대 읍성의 원형을 간직한 해미읍성이었다. 진남문을 지나 성벽에 가까이 다가가 본다. 돌마다 새겨진 이름들, ‘각 자석’이라 불리는 흔적들이다. 성을 쌓았던 사람들의 손길이 수백 년의 비와 바람을 지나 지금까지 남아 있다.

옥사 앞에는 거대한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호야 나무’라 불리는 이 나무는 천주교 박해의 시간을 묵묵히 지켜본 증인이다. 그늘 아래 서 있으니 오래된 세월이 조용히 내려앉는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짧은 기도를 올렸다. 고통의 시간마저 품고 서 있는 나무의 침묵이 마음 깊이 스며든다.

청허정에 오르자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소나무 숲 너머로 이어진 성벽은 이제 평화로운 산책길이 되어 있다. 한때 비극이 머물던 자리에는 여행자들의 웃음이 흐른다. 시간은 상처를 완전히 지우지 못하지만, 그 위에 새로운 풍경을 얹어 놓는다.

돌아오는 길, 문득 뒤를 돌아본다. 담장 너머로 흔들리던 수선화의 물결이 다시 떠오른다. 아마도 봄은 그렇게 남는 것인지 모른다. 화려한 풍경이 아니라 마음 한편에서 오래 흔들리는 작은 색 하나로. 그날 서산에서 만난 봄은 노란빛이었다. 그리고 그 빛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이번 여정은 장소의 아름다움만큼이나 함께한 이들의 온기로 가득했다. 여행의 기틀을 마련해 주시고 버스 대여비까지 혼자 부담하신 송영환 회장님, 특히 점심 식사를 흔쾌히 대접하며 여정의 풍요를 더해주신 조운형 회장님의 따뜻한 배려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특별 찬조를 해주신 박완순 님, 안병준 님께도 고마운 마음 금할 길 없다. 또한 함께 나눈 담소들은 서산의 풍경만큼이나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전홍태 님, 이육제 님, 그리고 강종운 님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말처럼, 좋은 이들과 함께 걸었기에 서산의 봄은 더욱 눈부셨다. 노란 수선화의 잔상과 고택의 고즈넉함, 그리고 초원의 푸름을 뒤로하며 다음 봄을 기약해 본다.

2026년 4월 9일
 
봄 여행을 마치고

◀ 작가 김종걸 ▶
○ 격 월간지《그린에세이》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원.

○ 수필집
“울어도 괜찮아”(2024),
“언론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명수필”(2022,공저)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수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 공모전 우수상 수상.(2021)
제6회 대한민국 다문화 인권문학상 공모전 동상 수상.(2025)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 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4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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