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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조귀순] 십 원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3월 18일
 
< 조귀순 / 수필가, 포천시 가산 출신, 저서《여치와 사담》 >
 
재래시장 안에 처음으로 대형 슈퍼마켓이 생겼다. 복잡한 시장골목에서 부대끼지 않고 과일, 정육, 생선 등 한번에 장을 보았다. 공산품도 눈에 쏙 들어오게 진열되어 예정에 없던 물건을 사게 되었다. 물건값을 치르는데 딱 10원이 부족했다. 전업주부에게는 신용카드 발급이 안 되던 때였다. 

집 근처 구멍가게라면 다음에 갖다줘도 될 일이었다. 주인아줌마가 내비둬, 할 때도 있었는데 대형 마트 계산원은 직원이었다. 얼른 라면 한 개를 빼려는데 “10원 내가 줄게요.” 앞서 계산을 마친 여자가 동전을 내주었다. 일반 가정집에 전화기도 흔치 않았다. 공중전화비가 20원쯤 되었나. 

암튼 10원이면 천 리에 떨어진 부모님의 안부를 들을 수 있었다. 연인은 사랑을 돈독하게 키우고 영업사원은 기백만 원짜리 계약도 따내는 거금이었다. 나는 장바구니에 담긴 물건을 거저 얻은 기분이 들었다. 내 또래로 보인 여자는 가수 정훈희를 닮았다. 늘씬한 몸매에 꽃무늬 홈드레스를 입고 미인대회에 나오는 지라시 파마를 하였다. 범접할 수 없게 외모가 돋보였다. 어디쯤 사는지 묻고 헤어졌는데 우연히 동사무소에서 다시 만났다.
 
밖으로 나돌 것만 같던 그녀는 집순이였다. 그녀 집 현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작은 화분에 꽃이 소복하게 피었다. 화초를 가꾸며 만날 방구들과 맞붙어 있다는 말에 낯선 벽이 허물어졌다. 흰 옥양목에 수를 놓아 가전제품 덮개를 만들어 씌웠다. 소설을 읽다 지루하면 덮어놓고 옷 수선을 하며 그렇게 놀고 있었다. 박음질은 재봉틀만 있으면 금방 둘둘 박을 일이었다.

“내가 재봉틀 빌려줄게요.” 작은애를 유치원에 보내고 나는 홈패션을 배웠다. 어릴 적 아버지 한복을 손수 짓던 어머니를 보고 자라선지 바느질이 낯설지 않다. 홈패션 교실에 등록하자마자 남편 월급을 뚝 떼서 최신형 전기 재봉틀을 사버렸다. 케이스가 있어 보관도 간편했다. 내게 재봉틀은 쏘니 전축보다 귀한 보물이 됐다. 그런 재봉틀을 나는 그녀가 10원짜리 동전을 내준 것처럼 자청해서 차로 실어다 주었다.
 
그녀 남편이 제주도로 발령이 났다. 애들 학교 때문에 떨어져 지낸다더니 그녀도 따라 들어갔다. 금방 올 거라고 짐은 창고에 두고 떠난단다. 재봉틀을 주고 가라고 했을 땐 이미 짐 속 어디에 들었는지 몰랐다. 돌아오면 그때 달라고 했다. 바느질이 시들해졌을 때라 미뤄도 괜찮았다. 그녀는 멋진 챙모자를 쓰고 바닷가를 누빈다고, 이웃집 밀감밭으로 마실도 간다면서 섬 여인이 되었다. 한번 정착한 곳을 떠나오긴 쉽지 않았다. 더구나 육지인이 동경하는 제주살이가 아닌가.

몇 년 후 그녀가 돌아왔을 때 재봉틀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창고 월세 때문에 짐을 장기간 놔둘 수가 없었다고, 큰아들이 이미 본가와 외가로 분산을 시켰단다. 찾아보면 어디엔가 있을 거라고, 곧 찾아줄 것 같더니 십수 년이 흘렀다.
 
세월에 많은 기억이 잊히지만, 되돌아오지 않은 물건 하나가 떠나지 않는다. 사람보다 물건에 얽힌 사연이 더 소중한 것인가. 나는 재봉질을 하면서 손바느질하던 어머니와 얘기했고 옷을 깁던 모습을 수시로 만났다. 지난 날의 결핍을 깁고 천을 잇듯이 충족을 이어 달았다. 사물을 보는 눈도 조금 트였는지, 찔릴 것만 같던 바늘이 이미지와 달리 강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바늘은 실을 도와서 해진 걸 기워주고 실의 발자국을 남긴다. 뭉툭한 귀가 때론 부처 귀를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에게 물건을 빌려준다는 건 마음 한 칸을 열어주는 일이지만 기억의 무게는 각자 달랐던 것 같다. 사람도 물건도 쓸모에 따라 잊히고 버려지는 건가. 나는 반짇고리에 남았던 재봉틀용 바늘 한 쌈을 꺼냈다.   

< 조귀순 / 수필가, 포천시 가산 출신, 저서《여치와 사담》 >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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