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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걸 / 수필작가 > |
| 나목으로 서 있던 나뭇가지 끝에서 잎눈이 돋는다. 밟으면 푹신한 흙에서는 은근한 온기가 올라온다. 겨울 가뭄이 아무리 길었어도 땅에 뿌리 내린 나무는 제때 움을 틔운다. 그 아래에서 새싹 또한 어김없이 고개를 든다. 새싹에는 설렘이 있다. 설렘은 늘 그리움을 데리고 온다. 봄은 특별한 이유를 묻지 않는다. 다만 때가 되면 누구에게나 조용히 다가온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의 크기와 색이 서로 다르듯 사람의 삶도 제각각이다. 벌레 먹은 잎도 있고, 햇빛을 덜 받으며 자라는 잎도 있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잎들은 모두 한 나무를 이루며 제 몫을 한다. 어느 하나 덜 중요한 것은 없다. 세상살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에게만 시선을 두면 삶은 쉽게 메말라 간다.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는 제 자리를 얻는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자란다는 것은 결국 서로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일일 것이다.
엊그제 큰 누님과 오랜만에 전화 통화를 했다. 누님은 조심스럽게 지난 시간을 꺼내 놓았다.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왔지만, 지금은 예전 같지 않아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았다. 그 말투에는 원망보다 체념이 먼저 묻어 있었다. 누님의 고향은 충남 논산 강경읍이다. 부친께서 일찍 돌아가신 뒤 누님은 집안의 맏이로 동생들을 돌보며 살았다. 호롱불 아래에서 공부하던 시절, 누님은 자신의 앞날보다 동생들의 학업을 먼저 챙겼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터로 나가 학비와 생활비를 보탰다.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둘은 대학을 마쳤고 여동생 둘도 무사히 학업을 마쳤다. 동생들의 결혼까지 치르고 나서야 누님은 비로소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각자의 삶이 바빠지면서 형제자매 사이의 왕래는 자연스럽게 느슨해졌다. 누님은 그 사실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고 했다. 내가 입영 영장을 받고 누님 집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누님은 나를 보며 철이 들었다며 늘 착한 동생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그때는 특별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 말은 내 삶의 기준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 맡은 일을 성실히 해내려는 태도는 그때부터 내 삶의 습관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누님과 가족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은 나를 쉽게 흐트러지지 않게 했다. 당시 누님은 조용하고 단정한 사람이었다. 겉으로 감정을 많이 드러내지 않았지만, 늘 단단한 의지가 있었다. 강경읍에서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낸다는 일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누님은 그 길을 끝까지 감당해 냈다.
지금의 누님은 예전과 조금 다르다. 무엇을 더 이루기보다는 내려놓는 삶을 택하고 있다. 오래 붙들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자신의 시간을 정리해 가고 있다. 오십·육십 년대를 살아온 이들 가운데 이런 기억 하나쯤 없는 이는 드물 것이다. 오늘의 성장을 우리는 흔히 교육의 힘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 뒤에는 조용히 자신을 덜어낸 사람들이 있다. 누님은 바로 그런 사람 중 한 분이다.
삼월이 지나도록 감나무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매화와 목련이 피었다 지는 동안에도 묵묵하다. 그러다 사월 중순, 비가 며칠 내리고 나면 시커먼 가지마다 잎이 한꺼번에 돋는다. 자연은 늘 제 시간을 알고 있다. 오늘도 감나무를 떠올리며 누님의 삶을 돌아본다. 늦게 피었지만, 마음이 깊은 나무처럼, 말없이 가족을 품어온 시간 들에 마음을 보낸다. 늦게 피는 나무일수록 그늘은 오래 머문다. 봄은 이미 와 있다. 그리고 그 봄은 지금도 조용히 자라고 있다.
2026. 03. 16
큰 누님을 생각하며
◀ 작가 김종걸 ▶ ○ 격 월간지《그린에세이》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원.
○ 수필집 “울어도 괜찮아”(2024), “언론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명수필”(2022,공저)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수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 공모전 우수상 수상.(2021) 제6회 대한민국 다문화 인권문학상 공모전 동상 수상.(2025)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 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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