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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걸의 플러스에세이 22]바다에 이르는 길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3월 03일
< 김종걸 / 수필작가 >

현장에서 이혼 상담을 마주할 때면 대개 "겪어보지 않아 잘 모른다.”라며 에둘러 피하곤 했다. 타인의 내밀한 가정사에 함부로 발을 들이는 것이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나는 여성들의 일상은 외면하기엔 너무나 시리고 가슴이 아팠다.
 
가족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고도 돌아오는 것은 상응하는 대우가 아닌 무시와 차별인 경우가 허다했다. '아줌마'라는 무미건조한 호칭 뒤에 가려진 고단한 영혼들은 지나치게 착하고 순진해서, 남편이 은밀히 이혼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홀로 관계의 회복만을 고민하곤 했다.

어느 봄날, 침통한 얼굴로 지인과 함께 찾아온 경희(가명)씨도 그랬다. 읍내 사무실은 법과 연관된 온갖 가정사의 종착지다. 전문적인 법률 대리인이 할 일이라며 밀어낼 수도 있었지만, 한 달 전 이미 상담을 나누었던 그녀의 위태로운 눈빛을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 내 앞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그녀를 보며 직감했다. 내가 그토록 신신당부했던 '임시압류'의 빗장이 풀렸음을.

당시 나는 이혼 소송의 절차적 중요성을 안내하며 단단히 일렀다. 남편 명의의 모든 재산을 임시압류한 뒤 소송에 임하라고, 합의안이 서류로 완성되기 전까진 절대 압류를 풀어주지 말라고. 그러나 남편의 교묘한 회유에 마음이 약해진 그녀는 종이 한 장의 약속도 없이 빗장을 열어주었고, 남편은 그 틈을 타 모든 재산을 빼돌린 채 "줄 것이 없다.”라며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좁은 상담실을 가득 채웠다. 지나간 실책을 질책하기보다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세상 살며 지갑에 돈이 두둑해야 어깨가 펴지는 게 사람 사는 이치입니다. 혼자 당당히 살아가려면 지금이라도 재산을 확보해야 합니다.” 나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향후 대응 방안을 차분히 짚어주었다. 재산 명시 신청부터 형사고소, 그리고 직장 급여 압류에 이르기까지,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해 끈질기게 매달려야 한다고 다독였다.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흐르는 눈물로 대신하며 문을 나섰다.

그리고 어느덧 9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엊그제 지인의 소개로 다시 만난 경희(가명)씨의 모습에 내심 놀랐다. 예전의 초췌했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밝은 색감의 옷차림에서 은은한 자신감이 배어 나왔다. 무엇보다 깊어진 눈매에는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깊고 푸른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혹독하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평화였다.
 
그녀는 더 이상 지난날을 원망하지 않았다. 비관의 흔적은 파도에 씻긴 모래알처럼 사라졌고, 이젠 장성한 아이들이 엄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법정 투쟁의 과정을 거쳐 제 몫의 권리를 찾아낸 뒤, 그녀는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회복한 듯 보였다.

당시 제복을 입고 현장을 지키다 보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드넓은 바다를 보는 순간이 있었다. 바다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깊은 산골짝의 작은 개울이 내를 이루고, 그 내가 강이 되어 굽이치다 비로소 이르는 곳이 바다다.
 
절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울부짖던 경희(가명)씨가 고난의 강물을 지나 평온한 바다에 닿은 모습을 보며, 내가 보탠 작은 보살핌의 무게를 떠올려 본다. 비록 내가 한 일은 보잘것없이 작은 조언이었으나, 누군가의 삶이 바다처럼 넓어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도 누군가의 메마른 개울가에 작은 물길 하나 내어주는 마음으로, 나는 다시 옷깃을 여민다.

2026.03.3

그해 봄날을 기억하며

◀ 작가 김종걸 ▶
○ 격 월간지《그린에세이》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원.

○ 수필집
“울어도 괜찮아”(2024),
“언론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명수필”(2022,공저)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수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 공모전 우수상 수상.(2021)
제6회 대한민국 다문화 인권문학상 공모전 동상 수상.(2025)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 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3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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