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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조귀순] 축석고개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2월 19일
 
< 조귀순 / 수필가, 포천시 가산 출신 >
 
고갯길로 핸들을 틀었다. 고향 가는 날, 쭉 뻗은 8차선보다 옛길로 가고 싶은 날이 있다. 진달래꽃 필 무렵엔 더욱 그랬다. 여전히 차 두 대만 겨우 비껴가는 축석고개. 한쪽은 깊은 낭떠러지이고 한쪽은 한나절이 지나야 산마루에 해가 든다.

“혹시 이쪽을 아시나요? 옛날에 이 고개, 참 삭막했어요.” 둘레길에서 내려온 남자가 약수를 마시며 묻는다. “저기 검문소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나는 뭔가 동지애를 느꼈다.

“너네는 이런 데서 어떻게 살어?” 1970년대 초, 언니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남도 사람인 그녀는 검문소를 보고 매우 놀라워했다. 철원. 포천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43번 국도를 통과하려면 모든 차는 축석검문소에서 반드시 멈췄다. 내가 버스 탄 건 60년대 후반이었으니 그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눈썹까지 철모를 눌러쓴 헌병이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라며 거수경례를 하고 버스 통로를 훑으며 지나갔다.

수상쩍다 싶으면 신분증을 요구했다. 절도있는 워커 발소리와 철모의 헌병이란 글자에서 위엄이 느껴졌다. 간첩 넘어온단 말을 밥 먹듯이 들어선가, 나는 오히려 헌병이 있어 안심되었다. 못 살 동네라던 언니 친구는 헌병들이 으짜 하나같이 멋찌냐며 창문 밖으로 고개를 쭉 빼고 봤단다. 세월이 흐른 어느 여름, 검문소에 총을 메고 반듯하게 선 헌병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가 딱 벌어지고 곱상한 얼굴이 낯이 익었다. 버스가 출발한 뒤에야 생각났다. 중학교 동창생인 것을. 얌전한 아이였는데 정말 의젓하고 늠름했다. 햇볕에 새까맣게 그을렸는데도 멋있었다. 약수를 마신 남자는 도시로 나가 출세한 선후배를 보면 당장 이 고개를 넘고 싶었다고 한다. 좁은 지역에서 초중고를 다니다 보니 학연과 지연으로 얽혀 웬만하면 다 아는 사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고.

야망을 품고 이 고개를 넘었지만 설령 실패하고 돌아와도 이 고개가 등을 다독여 줄 것 같은 든든함도 있었단다. 누군가는 답답해 도망치듯 이 고개를 넘었고 누군가는 금의환향하며 되넘었다. 특히 그 시절 여자들은 남자보다 일찍 취직하고 결혼하며 이 고개를 완전히 넘어갔다. 어머니는 양주(지금은 의정부시)에서 이 고개를 넘어와 포천청년과 결혼했다. 여자들은 결혼을 계기로 도시로 나가길 바라는데 산골로 들어왔다. 농지는 많았어도 천수답 농사로는 가산을 불리지 못했다.

자식은 많아지고 어느 해인가 새집을 사려는데 집값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어머니는 이 고개를 넘어 친정으로 갔다. 그 성정에 돈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셨을 텐데, 고개를 넘는 발길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어머니의 어머니는 눈치로 알아채시곤 모아놓은 쌈짓돈을 손수건에 둘둘 말아 주셨다고 한다. 그때 장만한 집에서 내가 태어났고 어머니의 어머니는 지금 이 축석고개가 있는 산 중턱에 잠들어 계신다.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던 날 나는 이 고개를 넘어서며 마음이 요동쳤다. 친구들은 시골을 벗어나서 좋다고 했지만 나는 홀로 남은 어머니가 애달팠다. 방학이면 외갓집에 가던 고개 같지 않았다. 도시 생활에 부대끼던 어느 날 고향 집엘 가는데 축석고개 산등성이에 핀 진달래꽃이 보였다. 골짜기 잔설 옆에서 부챗살 같은 햇빛을 받고 피어 있었다. 삭막한 고개에도 봄은 있었다.

사실 축석고개는 따스한 곳이다. 소흘읍 어룡리에 부사를 지낸 백(1643~1720)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부친이 위독 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병간호에 전념했다. 어떤 약도 효험이 없어 탄식하고 있는데, 꿈에 산 신령이 나타나 석밀(석청)을 먹으면 병이 나을 거라고 했다. 석청을 구하기 위해 온 산을 헤맸다. 그러다 호랑이를 만났다. 내가 죽으면 아버지는 누가 돌보냐고 엎드려 통곡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호랑이는 간데없고 바위만 남았다.

그 바위틈에서 흘러나온 석청을 받아 아버지를 살렸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범바위(효자바위)라고 불렀다. 그 후 오백주가 매년 이 바위에 와서 부모님의 만수무강을 축원했다 하여 축석령(祝石嶺)이다. 효심이 살아있는 곳인데 한국 전쟁 당시 공산군이 탱크를 밀고 이 축석고개를 넘어 서울로 진입하려 했다. 그때 변변한 무기가 없어 몸을 던져 희생된 그 영령을 기리는 현충탑만 보인다. 래슨 받았을 때 검문소가 있던 자리를 지난다. 검문소는 오래전에 없어졌다.

그 자리에서 서울 쪽으로 대전차 방호벽을 세웠다. 88서울올림픽개최가 결정 나고서였다. 위급 상황 시 피란민이 서울로 빠져나가면 콘크리트 구조물인 방호벽을 무너뜨려 탱크부대를 막는 역할이었다. 수도(首都) 서울을 지키고 국민을 보호한단 취지였다.

나는 결혼해 멀리 떨어져 살았지만, 고향으로 들어서고 나가는 관문에서 방호벽을 볼 때면 공격받게 될 위험지역에 갇힌 것 같았다. 고향 사람들은 안전하게 저 방호벽을 넘어올 수 있을까. 동굴 밖으로 벗어나는 방법을 잊은 동물처럼 방호벽 안에 있어서 평안할까. 방호벽은 무려 24년이 지나서야 헐렸다.

포천과 의정부시의 경계점인 축석고개. 이쯤 오면 고향에 다 왔다는 안도감이 생긴다. 막차를 타도 ‘여기서부터 포천입니다’라고 쓰인 이정표만 보면 안심된다. 어디쯤 오냐고 물을 때 지금 막 축석고개 지나간다고 하면, 전기밥솥에 불 꼽아야겠다던 어머니 말씀이 들리는 것 같다. 내 안의 봄을 발견하고 싶을 때 나는 무시로 이 고개를 넘는다.

< 조귀순 / 수필가, 포천시 가산 출신, 저서《여치와 사담》 >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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