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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걸의 플러스에세이 19] 느리게, 또 느리게

- 먼저 떠난 친구를 생각하며-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2월 02일
< 김종걸/ 수필작가 >

고교를 졸업한 지 사십사 년 만에 친구들과 함께 청산도로 여행을 떠났다. 모두 바쁜 삶을 살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시간을 냈다. 얼굴에 새겨진 주름만큼이나 각자의 세월도 깊어져 있었다. 근사하게 늙어가고 있으면서도 가끔은 사는 일이 버거워 세월이 빨리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친구가 있었고, 인생의 풍요를 누릴 나이가 되었음에도 자식의 결혼과 손자 양육에 남은 열정을 쏟고 있는 친구도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하늘을 보게 되었다며, 오래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마음이 아프다는 친구도 있었다. 남은 생은 오롯이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는 말들 사이에서, 나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지점에 서 있는 듯해 막막했다.

청산도의 첫날밤은 자유로웠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시끄럽게 돌아다녔고, 겅중겅중 뛰기도 했다. 큰소리를 내며 고스톱을 쳤지만, 이웃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늘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조심하며 살아온 아파트 생활에서 벗어나자, 몸과 마음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려버린 듯했다.

새벽녘, 뒷산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잠결에 듣는 새소리는 마치 우리를 맞이하는 인사처럼 느껴졌다. 창문을 여니 언덕을 넘어 불어오는 산바람이 상쾌했다. 우리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 청산도의 아침 일출을 바라보았다. 가족의 안녕을 빌었고, 바닷길을 걸으며 잠시 나만의 시간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넓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는 동안, 내 안의 막막함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고 먼저 떠난 한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간다. 나 또한 수많은 인연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다시 보고 싶은 사람, 마음 깊이 그리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늘은 유독 한 친구가 떠오른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 이형복이다. 그는 참으로 인간다운 품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고매한 인품에서 깊은 말과 행동이 나온다는 말을 그는 삶으로 보여주었다. 고교 졸업 후 삼성중공업 현장에서 일하며 시대를 앞서가는 이상을 품었고, 사회 현안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오가도 결코 거친 말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낙천적이고 생글거리던 그가 어느 날부터 말수가 줄고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사연이 있음을 짐작했지만,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1983년 오 월 초순, 내 마음의 고향인 흑산도 성당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의 놀라움은 아직도 생생하다. 좋은 품성을 지닌 사람을 신은 외면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흑산도를 떠난 뒤 서울에서 근무할 때도 그는 변함없이 환한 얼굴로 나타나 주었다.

졸업 후 사십여 년 동안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메일과 안부 전화로 인연의 끈을 이어왔다. 그러나 오늘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밤새워 밀린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어도 대답이 없다. 이번 여행에 함께하지 못한 친구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전화기를 들었다가 이내 내려놓고 만다. 가슴만 울렁거릴 뿐이다.

여행을 다녀와 글을 쓴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풍경과 우연한 마주침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살아온 흔적을 한 줄이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에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훗날 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진다 해도, 손자들이 우리 할아버지는 수필을 쓰던 사람이었다고 기억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청산도를 다녀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곳에서 함께 느리게 숨 쉬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이른 새벽 눈을 뜨자마자 글을 쓴다. 진실했던 친구와의 추억을 마음에 새기며, 이제부터는 청산도에서 배운 ‘느리게, 또 느리게’를 실천하며 남은 삶을 살아가고 싶다.

◀ 작가 김종걸 ▶
○ 격 월간지《그린에세이》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원.

○ 수필집
“울어도 괜찮아”(2024),
“언론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명수필”(2022,공저)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수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 공모전 우수상 수상.(2021)
제6회 대한민국 다문화 인권문학상 공모전 동상 수상.(2025)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 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2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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