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날짜 : 2026-10-21 오후 04:29:09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원격
뉴스 > 문학

[김종걸의 플러스에세이 16] 그대가 있으니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5년 12월 22일
< 김종걸/ 수필작가 >

아침의 문턱은 늘 그렇듯 고요했다. 그러나 그날의 빛은 유난히도 생의 결을 깨우는 듯했다. 잠결의 온기 속에 오래 품어온 어떤 생각이 문을 두드린 것이다. 이유라 할 만한 것은 없었으나, 오래 굴려서 온 마음이 마침내 자리를 잡은 날이었다. 그래서 그곳을 향하기로, 오래전부터 마음속에만 존재하던 길 위에 발을 올려놓기로 결정된 날이었다.

커튼을 뚫고 스며든 햇살은 벽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창밖의 새들은 봄날의 어조로 속삭였다. 집 안에는 먼저 깨어난 아내의 다정한 손길이 공기를 데우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정성이라는 이름의 아침이 환히 놓였다. 그 반짝임 앞에서 하루의 첫 발걸음은 이미 축복을 얻은 셈이었다. 아들딸의 환한 배웅, “좋은 시간 담아오라”라는 그 말들 속에서 이 여정은 어느새 혼자가 아닌 둘, 아니 셋과 넷의 온기로 출발하고 있었다.

하늘은 깊고 공기는 온화했으며, 구름은 더없이 젖어 있었다. 설악의 능선은 저마다 제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순례자를 맞았다. 길가의 초록은 바람에 흔들리며 오래전 잃어버린 마음의 질감을 되살렸다. 미시령의 굽이를 돌아갈 때면 곳곳이 숨결처럼 부풀어 오르는 흰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 풍경은 마치 오래된 상처 위에 놓인 따스한 손 같아, 누구라도 잠시 걸음을 늦추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낙산 해변에 이르렀을 무렵, 바다는 커다란 숨을 들이켜 모래밭을 적셨다. 너울은 파도라기보다는 한 생의 회상처럼 해변을 쓰다듬었다. 연인들은 구름 아래서 서로를 품고 사진을 남겼고, 바다는 그들 뒤에서 무한한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바다는 달랐다. 파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부서지는 청춘의 기운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바다는 다만 바라보게 만드는 어떤 깊이를 품고 있었다. 지난날의 바다, 그해 겨울의 바다도 그러했다. 군 복무 시절 편지로 마음을 나누던 한 여인과 끝을 맞은 뒤,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이곳에 내려 마음을 바다에 내맡기던 날이 있었다. 

헤어짐이란 것이 늘 그러하듯, 허전함은 몸의 중심을 잃은 것처럼 휘청였었다. 그 허전함을 달래려 낙산 길을 걸었던 기억, 그 계단 위에서 친근하고도 우아했던 손 편지들을 태웠던 순간, 글씨가 연기처럼 사라지며 마지막 매듭을 허공에 풀어놓던 그때의 떨림이 여전히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날 소각하듯 지웠던 무수한 글자들은 사실 삶의 파편들이었다. 서로의 젊은 날이 비스듬히 포개져 있던 기억들, 그마저도 불빛 속에서 천천히 스러졌다. 낙산사의 기와는 그 모든 시절을 묵묵히 지켜보던 증인이었고, 오늘도 예나 다름없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길에는 새로운 그대가 있었다.

집을 떠날 때 마지막까지 손을 다독이던 이, 정성으로 배낭을 채우고 마음을 챙겨준 이, 멀리서도 늘 함께 걷는 이, “그대가 있으니.”

낙산의 파도는 더 부드럽고 설악의 능선은 더 깊어지며 한때 잃었던 마음의 자리마저 따스한 빛으로 채워졌다. 기억 속의 그대가 지나간 자리 위로, 지금의 그대가 잔잔히 내려앉고, 흐르는 구름은 오래된 슬픔을 걷어내며 새로운 여정의 길목을 밝혀주었다. 그래서 오늘의 바람은 말없이 속삭였다. “그대가 있으니, 이 길은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 작가 김종걸 ▶
○ 격 월간지《그린에세이》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원.

○ 수필집
“울어도 괜찮아”(2024),
“언론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명수필”(2022,공저)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수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 공모전 우수상 수상.(2021)
제6회 대한민국 다문화 인권문학상 공모전 동상 수상.(2025)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 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5년 12월 22일
- Copyrights ⓒ포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
 
PBS 포천방송 TV
경기도
생활상식
가장 많이 본 뉴스
정보 커뮤니티
상호: 포천신문 / 주소: 경기 포천시 해룡로 130-38 (동교동)
발행인·편집인 : 김현영, 편집인 강신옥 / mail: ipcs21@hanmail.net / Tel: 031-542-1506~7 / Fax : 031-542-1115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기 아50080 / 등록일 : 2009년 6월 22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현영
Copyright ⓒ 포천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