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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걸의 플러스에세이 14] ‘나는 누구인가.’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5년 12월 10일
< 김종걸/ 수필작가 >

아침 햇살은 느리게 벽을 타고 오르며 방 안에 포근한 기척을 드리운다. 그 부드러운 빛을 바라보면, 오래된 편지 속 잊힌 문장을 다시 읽는 듯한 기분이 든다. 계절마다 다른 향기가 배어 있는 문장들 사이에서, 오늘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나온 날들의 온도를 더듬는다.

사람은 누구나 문득 떠나간 시간들이 그리워지는 순간을 맞는다. 숨죽여 있던 기억의 그림자가 구름처럼 밀려올 때면,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오래 감춰둔 감정이 조용히 깨어난다. 서울을 떠난 지도 어느덧 십여 년. 바쁘게 살아온 시간 속에서 나를 들여다볼 여유를 잃는 동안, 갱년기의 파동도 모르는 새 스쳐 지나갔던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요즘 마음은 더 부드럽고, 더 쉽게 흔들린다.

어느 날 책장을 넘기다 이유 없이 눈물이 흘렀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문장도, 상처를 건드리는 장면도 없었건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나 자신이 놀랐다.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도, 스친 생각 하나에 눈물이 차올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이것이 남자의 갱년기라면, 자연의 이치란 참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싶어 쓸쓸하면서도 묘하게 따뜻했다.

34년 동안 경찰관으로 살아오며 체득한 버릇일지도 모르지만, 한 번 마음을 기울이면 깊이 빠져드는 성향을 지녔다. 서울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도, 어린 시절 고향 마당에 소낙비가 내릴 때 피어오르던 흙냄새가 유독 그리웠다. 결국 자연을 향한 작은 갈망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고,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천천히 자연의 속도와 표정을 닮아갔다.

이곳의 고요는 때로 숨 막힐 만큼 깊지만, 그 안에는 생의 소리들이 숨어 있다. 저녁 바람의 낮은 속삭임, 풀벌레들의 느린 합창, 어둠 속 달과 별이 전해주는 오래된 위로의 목소리들. 그 소리들은 소란스럽지 않다. 오히려 마음의 빈틈을 다정하게 감싸주고 지친 하루를 토닥이는 손길 같다. 그래서 깊은 밤이면 자연과 나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밤하늘의 별들은 얼음 조각처럼 차갑게 빛나지만, 그 끝에는 은근한 온기가 느껴진다. 길가의 작은 풀 한 포기, 바람에 흔들리는 가냘픈 나무 한 그루조차 존재만으로 귀하다. 자연이 내게 건네는 위안과 울림은 크다. 그렇다면 그 긴 시간 동안 누군가에게 작은 빛이라도 되어주었을까. 자연처럼 큰 울림을 주지 못했을망정, 한 사람의 마음에 조그마한 온기를 남긴 적은 있었을까. 그런 생각에 잠기다 보면 마음은 더 조용히, 더 깊게 가라앉는다.

누군가 꽃 앞에서 한 번 발걸음을 멈추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하루에는 작은 변화가 일어난다고 한다. 우리가 마음을 준 대상은 결코 고독하지 않다.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마음은 언제나 마음의 언어로 반응한다. 눈앞의 세계가 이렇듯 따뜻하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얼마나 넉넉하고 신비로울까. 그 생각에 잠길수록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해진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문득 미소가 떠오른다. 잘 살았는지, 덜 살았는지는 모두 운명처럼 말하지만, 이제 몸과 마음이 더 부드럽게 숨 쉬는 자연 속에서의 삶을 갈망한다. 누구든 배움과 품격을 품은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은가. 나이와 상관없이 마음의 근육은 여전히 성장하고, 지적 욕망은 언제나 온기를 품는다.

자연 속에서 나만의 철학을 빚어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편의 시에도 진리가 깃들 듯, 지난 시간들도 저마다의 의미로 충만했다. 앞으로의 삶은 더 깊은 결을 지닌 하루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과연 내가 그렇게 걸어갈 수 있을까. 혹여 그러지 못하더라도, 다시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나 이번에는 한결 따뜻한 마음으로, 조용히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여전히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 작가 김종걸 ▶
○ 격 월간지《그린에세이》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원.
 
○ 수필집
“울어도 괜찮아”(2024),
“언론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명수필”(2022,공저)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수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 공모전 우수상 수상.(2021)
제6회 대한민국 다문화 인권문학상 공모전 동상 수상.(2025)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 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5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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