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자락의 바람은 언제나 고요했다. 그 고요 속에는 오래된 시간의 숨결이 서려 있었다. 그 아래 자리한 대전 유성의 작은 카페에서 친구 충현의 아들 결혼식을 축하했다. 젊은 신랑 신부의 눈빛에는 봄 햇살이 비쳤고, 우리의 얼굴에는 세월의 그림자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축하의 말과 웃음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마음 한쪽 편이 저릿했다. ‘이제는 우리가 아버지의 자리에 서 있구나.’ 그 생각 하나가 가슴을 스쳤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우리는 인생의 겨울 들머리에 서 있었지만, 그 사실이 서글프기보다는 오히려 따뜻했다. 삶의 무게를 견뎌낸 이들만이 알 수 있는 평온이 그 자리에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자, 우리는 계룡산의 품으로 발길을 옮겼다. 동학사로 향하는 길목은 단풍의 마지막 숨결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초겨울의 문턱에서 만난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너무 푸르고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그 푸르름은 오래된 친구의 눈빛처럼 나를 향해 말했다. “괜찮다. 너는 잘 걸어왔다.” 그 말에 대답하듯, 내 안의 오랜 피로가 천천히 녹아내렸다.
동학사의 돌계단을 오르며 친구들과 함께한 지난 세월을 떠올렸다. 젊은 날, 온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꿈을 말하고, 허무를 논하고,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미래를 그리던 시절엔 두려움이 없었다. 국립 OO 기계공고를 졸업하면 불가능이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칼이 희끗해졌고, 그때의 열정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었다. 절 마당에서 기념사진도 남기고 바람 소리를 들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 하늘, 참 고맙다.” 누군가의 대답은 없었지만, 산새 한 마리의 울음이 그 말을 대신했다.
하루의 먼지와 피로를 씻기 위해 찾은 대중목욕탕에서 김 서린 거울 속 내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 거울 너머에는 청춘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서 있었다. 서로의 시선을 마주 보는 친구들의 눈길이 세월을 견딘 우정의 온기로 다가왔다. ‘그래, 우리는 여전히 함께 있구나.’그 깨달음이 어쩌면 뜨거운 물보다 더 따뜻하게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저녁은 1회 동창생 가족이 운영하는 한방오리집에서였다. 약재 향이 은은히 피어오르고, 오랜 벗들의 웃음이 그 향 속에 섞였다. ‘보약 같은 인연’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것이리라. 우리는 서로 함께 마시고 웃으면서 잊었던 이야기들을 꺼내놓았다. 말 한마디가 끝날때마다, 술 한잔이 돌 때마다 세월의 쓴맛도 조금씩 달아났다. 그날의 식탁 위에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함께 견뎌온 시간의 온기가 김처럼 피어올랐다.
밤이 깊어 호텔 방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별빛이 묵묵히 깔려 있었다. 그 빛은 오래된 약속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우리는 다시 흩어지겠지만, 오늘 함께 웃었던 기억만은 별빛처럼 서로의 하늘에 남아 있으리라.
이튿날 아침, 황태 해장국과 도가니탕으로 숙취를 달랬다. 국물의 깊은 맛이 속을 데워주자, 마음이 먼저 풀렸다. “하∼ 이게 인생의 맛이지.”누군가의 말에 모두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젊은 날의 잔광과, 함께 늙어간다는 안도감이 함께 있었다. 식사 후, 우리는 대전의 명물 성심당으로 향했다. 아직 아침인데도 사람들의 행렬은 200미터를 넘었다. 찬 공기 속에서 기다리며 농담을 주고받는 순간, 우리는 잠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손에 쥔 따뜻한 빵 봉투는 가족을 향한 사랑이자 살아 있음의 증거였다.
귀가길, 승용차 뒷좌석에 몸을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을의 끝과 겨울의 시작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부드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초겨울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 속에는 어떤 따스함이 숨어 있었다. 그 따스함은 곁에 있는 친구들, 세월의 굴곡을 함께 견뎌온 사람들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 나의 생각도 같았다. 서로 함께 늙어간다는 것은, 서로의 기억이 되어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세월이 흘러도 우정은 여전히 희망의 봄빛을 품고, 그 빛이 초겨울의 하늘 아래서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다.
1박 2일의 짧은 여정이 끝나갈 무렵, 마음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삶은 결국 이런 하루들의 합이구나. 푸른 하늘 아래 서로 웃으며 걷고, 함께 밥을 나누고, 오래된 인연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 그것이면 충분하다.” 초겨울의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그 푸름 아래에서 우리의 우정은 또 하나의 계절을 맞이했다. 하늘을 향해, 조용히 마음의 인사를 올렸다. “이 푸른 하늘 아래서, 우리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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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김종걸 ▶
○ 격 월간지《그린에세이》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그린에세이 작가회 회원
○ 수필집
“울어도 괜찮아”(2024), “언론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명수필”(2022,공저)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수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공모 우수상 수상.(2021).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2019)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