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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걸/ 수필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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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이 한결 드높고 푸르다. 유독 지난여름은 폭염과 폭우로 유난히 길었다. 그 무더위를 견디며 여름이 언제 끝날까? 막막했는데, 어느새 백로(白露)를 거처 한로(寒露)가 지났다.
요즘 해가 질 녘 들길에 나서면, 바람결에 벼 이삭들이 서로를 스치며 내는 소슬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야만 들리는 맑고도 가벼운 안단테의 서곡.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오래전 현장의 기억들이 문득 가슴 깊은 곳에서 깨어난다.
그 시절, 세상을 버티려면 직업이 필요했고, 내게 주어진 직업은 ‘경찰’이었다. 그 이름은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었고, 묵은 설움을 견디게 하는 버팀목이었다. 경찰학교에서의 긴 교육과 실습을 마치고 드디어 경찰서로 발령받던 날, 이른 아침부터 흥분과 설렘이 가슴을 두드렸다. 지인의 권유로 시작된 길이었지만, 그날만큼은 내 인생의 모든 기억이 하나로 포개져 있었다.
인사담당자가 출근하길 기다리며 발령받은 동료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궁금한 것은 하나였다. ‘현장으로 나갈까, 경찰서에 남을까.’ 모두 대답은 알고 있었다. “새내기는 원래 현장 경찰이야.” 그 말에 실망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현장 경찰은 하루 스물네 시간을 꼬박 채워야 했고, 그다음 날은 시위 현장으로 나가야 했다. 숨 고를 틈 없이 다시 사무실로 복귀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우리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모두가 현장 경찰로 발령받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만나면 웃으며 말했다. “우린 현장의 해결사야, 해결사.” 자조였지만, 그 안엔 묘한 자부심도 있었다.
내가 부임한 곳은 서울역 뒤편에 있었다. 도시의 심장부처럼, 늘 바쁘고 시끄러운 곳이었다. 새벽이면 술 취한 이들이 몰려들었고, 낮이면 주민 간의 다툼이 이어졌다. “속였다.”“거짓말했다.”“때렸다.”“멱살만 잡았다.” 끝없는 진술들이 부딪쳤다. 가정사로 번지는 싸움 속엔 늘 낯 뜨거운 사연이 섞여 있었다. 그 복잡한 감정을 풀어내는 일이 곧 내가 할 일이었다. 그래서 현장 경찰은 때로 변호사이자, 상담가이자, 중재인이기도 하다.
현장 경찰은 언제나 사건의 문턱에 선다. 문턱은 낮지만, 그 안쪽으로는 인간의 깊은 어둠이 숨 쉬고 있었다. 사건의 양쪽은 늘 자신이 옳다고 말한다. 증인을 세우고, 증거를 내민다. 겉으로 보기엔 두 쪽 다 진실해 보이지만, 진실은 둘일 수 없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거짓을 말한다.
그 거짓의 그림자를 찾아내는 일, 그것이 경찰의 숙명이었다. 사건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연 내가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실수 없이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을까.’‘ 내 마음의 무게가, 사건의 높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늘 접하는 사건마다 사건과 사람들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려 애썼다. 너무 가까우면 진실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찰에게 필요한 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모든 사실로부터 불편부당한 거리를 지키는 용기였다. 그러한 용기로 매사에 어려운 일을 하나도 마다하지 않았다. 늘 섬세하게 일하고, 모든 이에게 평안을 전한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사람들은 종종 말했다. “당신은 경찰이란 직업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아요.” 그러나 나는 안다. 현장에서만큼은 누군가의 절박한 밤을 지켜낸 해결사였음을.
오늘 따라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서늘하다. 그때의 들녘처럼 내 마음에도 잔잔한 바람이 분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진실과 마주 선다. ‘현장 해결사.’ 그 이름 속에, 내 젊은 날의 모든 밤과 새벽이 살아 있다. 진실은 언제나 바람처럼 스쳐 간다. 붙잡으려 하면 흩어지고, 외면하면 가슴 깊은 곳에서 다시 일어선다.
오랫동안 그 바람이 스치는 현장에서 직접 사람들의 사연을 들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자신이 옳다고 말했다. 그 모든 말의 결을 지나며 알게 되었다. 진실이란 완벽한 빛이 아니라, 어둠과 빛 사이에서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인간의 떨림이라는 것을. 이 글은 그 떨림 속에 서 있던 나, 한때 ‘현장 해결사’라 불리던 한 사람의 조용한 고백이다.
2025, 10, 09 연휴 마지막 날 저녁에
◀ 작가 김종걸 ▶ ○ 격 월간지《그린에세이》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그린에세이 작가회 회원 ○ 수필집 “울어도 괜찮아”(2024), “언론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명수필”(2022,공저)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수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공모 우수상 수상.(2021).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2019)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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