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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걸의 플러스에세이 6] 뿌리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5년 08월 27일
< 김종걸/ 수필작가 >

한식날, 고향으로 향했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묘를 파하여 천호성지 봉안 경당에 안치하는 날이다. 길옆 양지바른 산기슭엔 성급한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고, 우뚝 서 있는 도로변 광고판에는 늘 새봄을 맞이하는 마음으로라는 글귀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새봄이란 단어가 일시에 파장을 일으켰지만, 고향의 가족과 천호성지에서 만나기로 약속된 날이라서 편안한 마음으로 봄 햇살 속을 조용히 달려갔다.

천호성지 봉안 경당은 1층에 있고, 2층은 부활 성당이다. 지하 같기도 하고 1층 같기도 한 봉안 경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성경 말씀과 더불어 시인의 글이 게시되어 있다. 천호성지에 갈 때마다 정독했지만 오늘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뭉클한 감정이 밀려왔다. 특히 ‘해 지는 곳과 해 뜨는 곳,’ ‘어제와 이제가 만나는 곳’이라는 구절이 부모님을 떠올리면서 긴 묵상의 시간을 안겨주었다. 형님 내외, 여동생 내외, 조카들 모두가 함께 참석한 가운데, 부활 성당 주임 신부님의 주례로 봉안 예식을 엄숙하게 올렸다.

우리 3남매는 김녕김씨 충의공파의 후손이며 쇠북 종(鍾)자 돌림으로 종백(鍾白), 종걸(鍾杰)이며, 여동생은 용례로 대종회 항렬과는 무관하다. 여성은 종종 가문의 항렬에서 예외가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김녕김씨 충의공파 시조(始祖)인 김시흥(金時興) 선조 님으로부터 27세 항렬, 쇠북 종(鍾)자에 준거한 이름이다. 항렬의 순서로 아버지는 천(天)자, 규(圭)자로, 규(圭)자 항렬이고, 나는 종(鍾)자, 아들 창연(昌淵)은 연(淵)자 항렬이다. 이는 다음 세대 항렬에 해당한다.
 
할아버지께서는 충남 논산시 은진면 김녕김씨 집성촌에서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로 이전하여 정착한 후, 아들 셋을 두었다. 큰아들은 강경으로 이전하여 2남 3녀를 두었는데, 김녕김씨 충의공파의 후손으로 쇠북 종(鍾)자 돌림인 첫째 종원, 둘째 종선, 3녀는 대종회 항렬과는 무관한 금자, 금옥, 옥자이다. 둘째 아들은 2남을 두었는데 역시 쇠북 종(鍾)자 돌림인 종삼, 종봉이다.

나는 어렸을 때 한글과 한문을 배웠다. 또한 틈만 나면 아버지께서 족보(族譜)를 꺼내 놓고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가르쳐 주셨다. 어떻게 보면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집안 족보에 눈뜬 셈이다. 족보는 지금까지도 내 삶의 근간이 되어 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나에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종걸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뿌리를 알아야 하느니라. 너는 어디를 가든 항상 김녕 김가라는 사실을 명심하거라. 너는 시조(始祖)인 김시흥(金時興) 선조 님으로부터 27세손이며, 충의공(忠毅公)의 17세손이다. 사육신(死六臣) 박팽년 ‧ 성삼문 등과 더불어 단종 복위를 위한 비밀결사를 구체적으로 지휘한 충의공(忠毅公) 백촌(白村) 김문기 선조님의 충의공파(忠毅公派) 후손이란다. 네가 조금만 더 크면, 김문기 선조님이 얼마나 위대한 어른이셨는지 알게 될 것이다. 절대 잊지 말거라.”그 말씀은 평생 내게 각인된 교훈이 되었고, 지금의 내가 뿌리를 생각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힘이었다.

김문기 선조님의 휘는 문기(文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이었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정치가이자 학자로 단종 복위 운동의 주역이었다. 사육신(死六臣) 파조(派祖) 충의공(忠毅公) 휘 문기(文起) 선조 님께서는 1399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沃川郡伊院面白池里)에서 호조판서를 역임한 퇴휴당(退休堂) 순(順)의 손자이며, 증용 의정 관(觀)의 아들로 태어났다.

1426(세종 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기사관으로 있으면서 세종 13년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예문관 검열 및 사간원 좌헌납을 거쳐 경상도 아사(亞使)와 안동부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고, 함길도 관찰사로 나가 변경의 각 지역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하는 장기 대책을 건의한 후, 실행에 옮겨 많은 치적을 남겼다. 이때 문종은 임종(臨終)을 맞아 김문기(金文起) 선조 님, 김종서(金宗瑞) ‧ 민신(閔伸) ‧ 조극관(趙克寬)에게 나이 어린 세자의 장래를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명을 받은 김문기(金文起) 선조님께서는 조정의 중의(衆意)를 능히 이끌 수 있는 인물로 신망이 두터웠으며, 성실하고 강직한 인품으로 능력을 인정받았기에 고명을 받드는 중임을 맡게 되었다. 1453(단종 1)년 형조참판에 제수되었고, 천추사(千秋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때는 이미 모든 권력이 수양대군으로 넘어갔으나, 이징옥(李澄玉)이 난을 일으키자, 토평서로 함길도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에 임명되어 난을 마무리 짓고 북변의 소요를 완전히 평정하였다. 

1455년에는 공조판서 겸 도진무로 있으면서 수양대군의 찬위(簒位)에 의분을 느껴 박팽년(朴彭年) ‧ 성삼문(成三問)과 더불어 결의하고 단종 복위를 위한 비밀결사를 구체적으로 지휘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자신의 희생으로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았다.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과정에서 중요한 임무인 병력 동원을 맡았는데 비록 거사가 성공하지 못했지만, 동지들을 보호하려는 의기는 말할 것도 없었고, 선왕의 고명을 받들기 위한 충절은 가히 하늘에 사무쳤으니 끝내 사지가 찢기는 차열형(車裂刑)을 받아 순절하셨다.
 
훗날, 충절의 정신으로 몸을 바친 지 275년이 지난 뒤인 1731(영조 7)년에야 복권되고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당시 선조님께서는 절의의 상징이었으며, 효성 또한 극진했고, 학문의 깊이에서나 인품에서도 만인의 우러름을 받았다는 기록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당대의 대문호이자 석학이었던 서거정(徐居正)은 역률에 의해 참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문기(金文起) 선조 님의 이름 뒤에는 반드시 ‘선생’이란 호칭을 사용하였고, 당시 여러 사우(祠宇)에 모셔졌다는 기록은 선조님의 인품과 정신이 널리 존경받았다는 증거이다. 만약 김문기(金文起) 선조 님께서 심약했더라면 수없이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 가문은 뿌리가 깊다. 그 뿌리는 단순한 혈통이나 족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충절, 정의를 위한 희생, 그리고 신앙과 학문에 대한 성실함 속에 흐르고 있다. 이 뿌리를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자랑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되새기는 일이다. 내가 부모님을 천호성지에 모신 것도 그 뿌리 위에서 이루어진 한 결정이었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평생 오직 자식들을 위한 삶을 사셨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말 한마디 없이 땀 흘리며 늘 묵주를 들고 가족을 위해 기도하셨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기도는 지금도 우리 가족 모두를 하늘에서 감싸고 있다고 믿는다. 아버님 또한 말씀이 적으셨지만, 늘 가족의 생계와 명예를 위해 묵묵히 모든 것을 감내하셨다. 우리 삼 남매는 부모님 헌신과 사랑 속에서 자랐고, 그런 부모님의 늘 부족한 자식이었다. 하지만 오늘 천호성지 봉안 경당에 부모님을 모시며 비로소 두 손 모아 정성껏 기도드릴 수 있었기에 조금은 마음의 빚을 덜 수 있었다.

부모님의 유해를 천호성지 봉안 경당에 모시게 된 것은 단순한 장례 절차가 아니었다. 이곳은 부모님과 우리가 신앙으로 연결되는 곳이다. 언제든 우리 가족의 영적인 뿌리이자 미래의 성지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형제자매들이 수시로 찾아올 수 있고 후손들도 쉽게 발길을 옮길 수 있는 곳이며 더 이상 벌초나 분묘 개장에 대한 걱정 없이 성당 미사와 함께 추모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이번 봉안 예식은 형님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만약 형님께서 “못 하겠다”고 하셨다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형님이 먼저 제안해 주셨기에 진정한 형제의 우애, 혈육의 정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어렵게 살았던 기억이 문득 떠올라 그 말 한마디에 눈시울이 붉어졌고, 마음이 뭉클해졌다.“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지요. 형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형님의 제안과 나의 동의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위로이자 안식이며 부모님에 대한 마지막 효도가 되었다. 

해가 산등성이에 걸릴 무렵, 모든 예식이 무사히 끝났다. 예정보다 조금 일찍 마무리되었지만, 마음 한쪽은 텅 빈 듯한 허전함으로 가득 찼다. 요즘은 꿈에서도 뵙지 못했던 부모님이 오늘따라 너무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살아생전 따뜻하게 안아주시던 모습, 내 이름을 부르시던 음성, 그 모든 것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귀갓길, 나는 더 이상 운전할 수 없어 차를 갓길에 세우고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았다. 아버지, 어머니… 하늘에서는 부디 평안하시기를.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우리는 늘 사랑받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그 사랑은 우리 안에 살아 있다. 이제는 그 사랑을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일, 가문의 뿌리와 정신을 지키는 일이 내가 남은 삶에서 해야 할 소명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부모님 곁으로 돌아갈 날이 오면, 그때는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냈다”고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훗날 내가 죽으면 반드시 부모님 계시는 천호성지 봉안 경당으로 돌아와 뼈를 묻겠다고 다짐하면서.

◀ 작가 김종걸 ▶
○ 격 월간지《그린에세이》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그린에세이 작가회 회원
○ 수필집
“울어도 괜찮아”(2024), “언론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명수필”(2022,공저)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수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공모 우수상 수상.(2021).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2019)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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