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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에게 듣는다] 망백의 광복군 김영관 선생님

"나라 잃는 설움 다시는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양상현 기자 / 입력 : 2015년 12월 29일


사람 나이 아흔아홉 살을 ‘백수(白壽)’라고 부른다. 일백을 뜻하는 ‘백(百)’이 아니다. 여기에서 ‘一’ 한 획을 빼면 ‘白’ 자가 되는데, 그게 아흔아홉이라는 데서 비롯한 단어다. 2015년 겨울, 백수를 바라보는 망백(望百) 나이의 노인을 뵈러 가는 길은 때마침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어두운 대낮이고 사뭇 떨렸다.

구국과 호국의 고장 우리 포천이 고향이라는 광복군 출신에게서 12월 초순경 편지 한통과 함께 '광복군은 결코 죽지않는다'는 제목의 책 한권이 포천신문사 이중희 대표 앞으로 배달됐다.

멀리서 고향 포천을 그리며 우리 포천신문을 매번 정독하며 망향의 시름을 달랜다는 포천신문과 인연이 깊은 분이 송파구 가락동에 산다는 말을 듣고 찾아 나선 길이었다. 그분이 바로 김영관 선생이다.

주소를 들고 찾아간 가락동의 한 아파트 문에는 '애국지사의 집'이라는 명패가 또렷하게 붙어있었다. 선생은 하얗게 센 머리를 가다듬으며 우리 취재진을 반겨주었다.

김영관 선생은 1924년 9월 15일 경기도 포천 영평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시대에 나서 보통학교·중학교를 나오고 경성 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일본군의 강제 징병을 피하기 위해 재학 중에는 징병연기가 가능한 사범학교를 선택했지만,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한 지 5개월만인 1944년 9월 징병통지서를 받았다.

이상하게도 일본인 한국인을 가리지 않고 사범학교에서 징병된 사람은 김영관 오직 한사람 뿐이었다. 입대 후 함흥에서 1달간 신병교육을 받고 중국 둥양에 있는 부대로 배치를 받았다.

보통학교 5학년 무렵 중경에 우리나라의 임시정부가 있다는 소식을 조선인 친구들에게서 듣고 "나도 나라없는 백성은 아니구나" 하며 흥분했던 기억을 떠 올렸다. 중국으로 자대배치를 받는다는 소식을 알자마자 일본군에서 벗어나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로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일본의 착취와 차별은 혹독했고, 감시는 잔인하고 지독했다. 요즘도 탈영은 큰 죄이지만, 당시 일본군에서 탈출을 감행한다는 것은 실로 목숨을 건 행위였다. 망국의 슬픔이 약관인 김영관의 삶을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과 고통은 어딜 가더라도 피할 수 없었다.

풍토병과 영양실조로 우여곡절과 천신만고 끝에 찾아 간 곳은 중경이 아니라 강서성(江西省) 중국군 제3전구 사령부에 파견 나와 있던 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였다. 그때 그는 태극문양과 사괘가 함께 그려진 태극기를 처음 봤다고 한다.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는 등 제각기 광복군을 찾아와 있던 15명의 한국인이 그를 포함한 5명을 태극기를 흔들며 반겼다. 그들의 입에서는 구슬픈 애국가가 함께 흘러나왔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아직 멜로디가 정해지지 않아 애국가를 ‘그리운 옛날’이라는 뜻의 스코틀랜드민요 ‘올드랭사인’ 가락에 맞춰 불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졸업식 노래(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작별이란 웬 말인가 가야만 하는가…)’에 애국가 가사를 넣어 부른 것이다. 태극기를 든 채 애잔한 애국가를 비장하게 부르는 이들을 보며 김영관은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는 "내가 저 태극기를 보려고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구나. 태극기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 곳에서 그는 강서성 상요에 있는 광복군 징모 제3분처와 같이 활동했다. 광복군 입대 후 김영관은 3개월간 국내침투훈련을 받았다. 광복군은 중국군·영국군·미군의 핵심 사령부에 근무하며 정보 핵심을 움직이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일개 사단보다 더 큰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또한 일본군의 배치 상황과 무장 상태 등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거나 일본군 통신과 포로로부터 수집한 정보를 통해 일본군의 취약점을 분석했다.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원형인 첩보기관전략사무국(OSS) 특별 훈련을 받기도 했다. 본국에 침투해 한미합동작전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일 것에 대비한 유격전 훈련도 이뤄졌다. 이는 출동 시기에 앞서 일제가 1945년 8월15일 항복하면서 실현하지 못했다. 실제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전략에 참여한 광복군에 역사적 평가는 앞으로도 계속 이뤄질 것이다.

5시간이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내내 망백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김영관 선생은 70여년전에 있었던 일들을 생생하고 또렸하게 기억해 내고 이야기했다. “광복군이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하겠다. 혹자는 광복군은 특별히 한 일도 없고 전투를 한 적도 없고 그저 뒤에서 밥만 먹고 앉아있었던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긴장의 연속이었고, 나는 광복군의 역할과 의미를 여덟 가지로 요약해 말하겠다.

첫째, 우선 역설적으로 이것을 생각해보라. 만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광복군이 없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해방한 후 연합군이 한민족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처리했겠나. 광복군은 임시정부를 뒷받침하는 힘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이었다. 국군이 없으면 정부도 존재 가치가 없는 것 아닌가. 둘째, 임시정부가 남의 나라에 있었지만 독립정부로서 행사했다. 광복군도 중국군에 예속하지 않고 독립정부의 국군으로서 임시정부의 통수권 하에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셋째, 카이로선언(1943년 11월 27일)에 영향을 줬다. 카이로선언을 발표하기 전 중국 장개석은 한국이 독립할 능력이 있다고 강조하며 연합국 대표를 설득했다. 처칠 영국 수상은 반대했지만 카이로선언에는 ‘한국인민의 노예상태를 유념해 적절한 시기에 자유와 독립될 것을 결의한다’는 조항이 생겼다. 카이로선언은 국제사회가 한국의 독립을 처음으로 보장한 것이다. 장개석의 한국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에서 출발한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현 루쉰공원) 일왕의 생일잔치와 승전 축하식이 열리는 자리에 윤 의사는 물통 폭탄을 던졌고 시라카와 일본 상해사령관 등이 목숨을 잃었다. 윤 의사의 상해의거는 죽어가는 임시정부를 살려 놓는 동시에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시켰다. 정치적 분열을 겪던 임시정부는 상해의거를 계기로 전환점을 마련하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장개석은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정규군으로 광복군을 조직했다. 상해의거에서 임정 그리고 광복군으로 이어지며 카이로선언에 영향을 준 것이다.

넷째, 광복군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다섯째, 연합국(미·영)과 협동작전을 수행했다.

여섯째, 국내외 국민들에게 희망을 줬다.

일곱째, 나라 안팎에서 이리 저리 갈라져있던 세력을 한데 모아 탄생한 것이 광복군이다.

여덟째, 나라는 망했지만 군맥, 군대의 맥은 끊이지 않았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했다. 하지만 이후 의병이 되고, 독립군이 되고, 광복군이 되면서 군대의 정신은 끊어지지 않았다. 군맥이 이어졌으니 나라도 계속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광복군은 해방 후 국군의 모체가 되었다.”

인터뷰를 끝내며 김영관 선생은 꼭기억해 달라며 한 마디를 남겼다.

“지금 우리나라의 정세는 우리가 나라를 잃었던 구한말의 정세와 비슷하다. 나라 잃은 원인을 알아야 되풀이 하지 않는다. 부패정치·국제 정세 둔감·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 때문에 나라를 잃었다. 다시는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한국과 일본이 지난 28일 외교장관회담을 열어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전격 합의했다. 3개 항의 합의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동원의 책임을 공식 인정하고, 일본 정부 예산으로 피해 할머니 지원 사업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내용이다.

아베 일본 총리는 “총리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발표했다.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사죄와 반성의 뜻을 나타낸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청년들을 일본 제국군대의 소모품처럼 취급하며 착취와 차별 대우를 한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일언반구도 없다.
ⓒ (주)포천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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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현 기자 / kunitachi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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