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가 생겨나고 뭔가 알아야 한다는 인간의 공통 된 욕구가 있어 역사 흐르는 동안에 수많은 배움과 가르침이 있었으리란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과 같은 사회 발전을 기하고 삶의 틀을 갖추는데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했음에 의의를 제기 할 이는 없을 것이라 여겨 고마운 마음 또한 크다 하겠다.
물론 그동안에도 가르치는 이의 자질 부족과 그릇 된 사고에 의해 잘못 가르친 예도 많았지만 그래도 잘 가르친 이의 수가 훨씬 많아 모든 이의 흉이 묻힌 경우 또한 있었겠지만 역사는 옳건 그르건 흘러가기 마련이고 그 평가는 후세에 맡겨진다.
단, 학식은 모자라면 그 후에도 얼마든지 보충이 가능하나 도덕심(人性)만은 한번 그릇 되어지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바로 잡기 어려움으로 가르치는 이의 입장은 녹봉을 받는 경제적인 거래가 아니고 이 나라의 장래를 책임지는 성직자(聖職者)의 거룩한 가슴 없이는 함부로 넘봐서는 안 되는 직종인 것이다.
그릇 된 가르침은 몇몇 학생을 잘못 되게 하는 게 아니라 이 나라의 장래를 망치는 결과가 된다는 이념 무장이 되지 않고는 넘보지 못할 신성한 곳임을 알고 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와서는 교편을 잡아서는 안 될 이들이 너무 많이 잡고 있어 이젠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종의 한 분야 일 뿐 더 이상 師道를 논할 계제가 아닌 것 같아 차라리 지금을 사도졸일(師道卒日)로 선포(宣布)하고 일곡(一哭) 한 뒤 아예 사도(師道)에 대한 이 사회의 기대를 끝내고 그냥 가르치는 이(전문직종)로만 남겨두는 것이 마음만이라도 상하지 않는 방편이 아닌가 생각 된다.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 윗물이 탁하면 아랫물은 자연히 맑을 수 없다)이라는 자연의 이치가 공부 못하는 제자를 위해 취한 스승의 방편이 고작 거짓으로 제자의 급수를 엉터리로 높여 주는 일이였고 그 밑에서 배운 제자가 부정 입시로 진학하려는 꼼수를 썼으니 그 스승에 그 제자다운 멋진 쇼가 아닌가싶어 탄식이 절로난다.
잘못 된 교육시책이 하달되어도 불의에 항거하는 용기한번 제자들에게 보여 준 적이 없이 그저 속으로만 안달하는 못난 자신들을 과연 제자들에게 어떻게 설명했을지 궁금하다.
인생한살이 밖에 못하고 가는데 그렇듯 소신한번 펴보지 못하고 자기 인생의 종말 앞에서 어떤 대차대조표를 쓸 것인가 말이다.
배움터를 이 꼴로 만들어 놓은 정치권과 국정 수행자들은 국민들에게 무슨 변명을 할 것인가. 입시를 위한 교육은 지식 팔고 사는 난전거리이지 그곳은 학가(學街)라 할 수 없는 곳이요. 국가관 없이 외국 가서 그 겉모습만 배워 온 이들이 교육정책을 입안했으니 어찌 국적 있는 교육이 될 까닭이 있으리오.
하여도 교육은 존재 되어야 하기에 이미 졸(卒) 해 버린 사도(師道)에 ‘어이 어이 어이’ 일곡재배(一哭再拜)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신사도정립(新師道定立)으로 신선한 새바람을 일으켜 뼈를 깎는 각오로 죄 값을 물은 뒤에 거듭나는 계기를 삼아야 하리라 여겨진다.
스승이 정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는데 그 아래서 배운 후학(後學)들이 무엇을 알아 정! 의를 수호하겠는가.
아무쪼록 이미 교단에 섰으면 지식을 팔아 연명하는 졸스런 장사꾼이 되지 말고 신성한 스승이 되어 제자들 가슴속에서만이라도 영원불변의 태양이 되어 주시길 온 국민은 빌고 또 비는 마음인 것을 야속히 사양치 말기를 신께 기원 드리는 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