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지나침은 부정을 초래하지만 우리안의 욕망을 잘 통제한다면 생성적이고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욕망의 소유는 지탄받을 행위가 아니다. 욕망은 살아있음의 표현이며 적극화하는 힘이다. 고도의 첨단기술이 요구되는 우주산업에 도전하는 행위도 욕망에서 비롯된다. 급변하는 경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미래 핵심 산업을 선점하려는 인간의 절박한 심정 또한 적극화된 욕망이다. 삶의 본질적인 욕구를 채우려는 욕망은 태초부터 존재해왔다.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 페르시아문명, 나일강의 풍요로운 혜택으로 찬란히 꽃핀 이집트문명 등은 물질문명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사랑과 자비를 설파하여 지혜의 유산을 남긴 히브리 문명, 민주주의를 고안한 그리스 문명, 아름다움과 선함에 대한 욕망, 창조물에 대한 경의, 사랑과 존중 등은 욕망의 결실이며 영혼을 살찌운다.
5. 욕망의 역기능
문제는 욕망의 구조가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욕망과 교묘하게 맞물리면서 왜곡된다는 점이다. 자본이 원하는 것을 욕망하고 자본이 원하는 것을 소비하며, 자본이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부화뇌동적 태도를 유도하는 바탕에는 각종 매체의 인위적 행위가 존재한다.
인터넷 등 매체는 사행성을 유도하고 비현실적인 환상의 욕망을 조작할 뿐만 아니라 획일화와 물신화를 초래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저서 '피로사회'에서 성과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사회를 '자기착취의 사회'라고 규정했다.
성과 사회에서 주인은 주인스스로가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고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닌다는 것이다. 노동수용소의 특징은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에 있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처럼 우리시대의 인간은 자발적으로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하며 스스로가 스스로를 가해하며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상대방에게 쏜 탄환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날아온 현상과 같은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고 제시한다. 타자가 존재하든 부재하든 자기실현의 욕구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로이드의 ‘공유지의 비극’을 연상케 한다. 합리적인 것 같지만 제 무덤을 파는 망상적 합리성, 주체를 위하고 주체에 의하며 주체의 착취 즉 자학적 착취는 결국 성과제일주의를 지향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6. 바람직한 인간의 욕망
욕망을 계발함으로써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인간의 창조, 사회의 발전을 낳는다고 할지라도 과도한 욕망의 추구로 인한 타락과 파멸의 가능성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상에 존재한 모든 생명의 법칙에는 절제의 법칙이 따르듯이 절제하는 태도를 가져야하며 소유와 소비지향적인 삶의 방식에서 존재지향적인 생활태도로 전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직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더불어 소욕지족(少欲知足)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에서보다 작은 것과 적은 것과 같은 사소한 일상 속에 내재되어있다. 크고 많은 것을 원하면 그 욕망을 채울 길이 없다. 사소함 속에 아름답고 고마운 삶의 향기가 스며있다.
부(富)이상의 부는 우리의 참된 행복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며, 오히려 넘쳐나는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근심과 걱정이 점철된 고통으로 행복이 침해된다.
에리히 프롬은 ‘탐욕이나 착취, 소유욕이나 자기도취증이 자신의 위신을 증대시켜 주기 위하여 사용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생활의 주인공이 됨과 더불어 책임감을 가지고 사회생활에 참여한 사람이 될 수 있게 하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이다.’라고 정의했다. 프롬의 이러한 정의는 사회가 나아가야할 건전한 방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