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장수. 21세 때 진사. 26세에 문과에 급제, 성균관 학사가 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70여명의 충성파 구신들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갔다. 조선조 이태조의 간청도 있었지만 충성파 의인들이 우리가 다 죽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덕망 높고 유능한 사람을 가리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를 내보내야 한다고 의견의 일치를 보고 황희로 하여금 새 왕조에 나가 벼슬하면서 백성을 구제하도록 했다.
새 왕조에 들어가 성균관 학관, 세자 우정자(世子 右正字 세자의 스승)를 시작으로 여러 요직을 거쳐 태종 때 도승지에 오르고 이어서 육조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1426년(세종 8) 우의정, 이어서 좌의정, 세종 13년 황희가 60세 되던 해 영의정에 제수하고 세종은 오랫동안 궁구한 자신의 치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때 황희와 같이 세종을 보필한 명재상이 맹사성(孟思誠)이었다.
황희는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고 사려가 깊었으며 청렴하고 충효가 지극하였다. 18년간 영의정에 있었으며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그는 나랏일에만 힘을 기울이고 집안 일은 돌보지 않았다. 어느 날 집안에 있는 여종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 여종이 와서 호소하였다.
“저 아이와 다투었는데 저 아이는 매우 간악합니다.” 하니까 황희는 “네 말이 맞다.”하였다. 이번에는 다른 아이가 와서 저 아이가 나쁘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황희는 이번에도“네 말이 맞다.”하는 것이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조카가 못마땅한 말투로 말하였다.
“아저씨의 흐리멍텅함이 너무 심합니다. 이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저 아이는 저렇게 말했으니 이 아이가 옳고 저 아이는 옳지 못합니다.”하니까 그는 역시“네 말도 맞다.”는 것이다. 황희는 때도 없이 글을 읽되 결코 자리를 구분하는 일이 없었다. 한번은 밭에서 일을 하다가 왕명을 받고 입궐하였는데, 쓰고 있던 삿갓과 작업복을 그대로 입고 입궐하였으므로 행색이 매우 초라하였다.
태종이 세종에게 위촉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런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즉시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그는 30년 동안 정승으로 있으면서 일을 처리할 때는 순리를 따랐고 도량이 넓어서 일을 처리함에 있어 대신의 체모를 잃지 않았다.
세종도 그 사려 깊은 행동과 신중한 일 처리에 늘 칭찬하였다. 어쩌다가 옛 제도를 변경할 경우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신은 임기응변의 재주가 없어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일을 감히 논의할 수가 없나이다. 그는 이론이 정연하고 항상 일 처리가 너그러웠지만 큰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나 시비를 가리는데 과감하여 아무도 그의 뜻을 꺽지 못하였다. 그는 90세의 나이에도 총명한 머리가 감퇴되지 않고 모든 제도와 문헌을 환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도량이 너그러워 감정을 좀처럼 나타내지 않았다.
세종은 황희와 함께 명재상 맹사성(孟思誠)의 보필을 받아 역사상 가장 빛나는 성군의 업적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