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약동(1416, 태종16∼1493, 성종13) 본관은 성주 호는 로촌 현형 덕손 의 자 1441년(세종23) 진사 1451년(문종1) 문과에 급제. 치부하는 것을 수치로 알고, 경사에 밝았으며 제주목사 이임시, 사냥 채찍까지 놓고 떠난 곧은 성품이라 이조참판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성종 때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여러 지방의 현감을 지냈다. 청백리 정신으로 한 평생을 살았고 그 결과 청백리로 녹선 되었으며, 78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어질고 후하였으며 마음가짐이 견고하였으며 치부하는 것을 수치로 알고 지냈으며 성품은 강직, 남에게 청탁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평생 청백하고 조심하여 자손들에게 금을 돌처럼 여기라고 가르쳤다. 영남의 거유 김종직과 고향이 같고 뜻이 같았으므로 서로 잘 지냈다고 한다. 만년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금강산 하로초에서 살았는데 로촌을 자기의 호로 삼은 것이다. 금강산에는 사당이 지어져 김종직과 함께 제사지내고 있다.
이약동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시냥할 때에는 채찍하나를 가졌는데 임기가 끝나 떠나올 때에는 그 채찍을 벽 위에다가 걸어두고 떠났다. 그가 떠난 뒤 제주도 사람들은 그 채찍을 보배처럼 간수하여 목사가 새로 부임하여 올 때마다 그것을 꺼내 놓았다. 세월이 흘러 그 채찍의 형상을 그려서 걸어 놓았다고 한다. 이는 바로 이약동의 청백한 정신과 선정을 기념하는 지방민들의 행동이었다.
임기를 마치고 제주에서 떠나 올 때 그가 탄 배가 바다가운데 이르러 갑자기 빙빙 돌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사공들은 모두 겁을 내어 얼굴빛이 파랗게 질려 있었으나 이약동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똑바로 앉아 침착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자 비장한 사람이 그의 앞으로 다가와서 “제주도민들이 목사님의 맑은 덕과 선정에 감사하여 금으로 만든 갑옷 한 벌을 마련, 훗날 목사님께서 갑옷을 입으실 때 이것을 드린다 하였습니다”하고 조심스럽게 보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약동은 즉시 금으로 만든 갑옷을 바다 속에 던지게 하였다. 그러자 바닷물이 잠잠해지면서 모두가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이약동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해 선물로 준 갑옷을 바다에 버리게 한 청백정심에 감동하여 나은 이야기로 여겨지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곳을 가리켜서 투갑면이라 불렀다고 전해온다. 그의 청백한 청백지 정신은 후세 임금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중종은 그의 뛰어난 정신을 칭찬하며 그의 자손들을 등용케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