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항[1567년(명종22)1618년(광해군10)]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 어릴 때부터 글재주로 소문이 났다. 어린 시절 어느 날 다리(脚)를 주제로 시를 짓게 하였다. 어린 강항은 “다리로 만리를 가지만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은 마음이다."(脚到萬里 心敎脚 - 각도만리 심교각)이라 하여 놀라게 하였다.
강항은 뒤에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이 되어서 큰 선비가 되었다.
1588년(선조21)에 진사, 1593년(선조21)에 문과에 급제, 교서관 박사, 전적, 형조좌랑 역임.
정유재란(1595년)때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이 되어 군량 보급에 힘쓰고 의병을 모집하여 싸우다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통제사 이순신장군 휘하에 들어가기 위하여 식구들을 이끌고 배를 타고 남하 하다가 왜병에게 포로가 되었다. 강항은 물에 빠져 죽을 결심으로 처자와 함께 바다에 몸을 던지기도 하고, 9일 동안 단식도 하여 보았지만 죽지 못하고 결국 일본 오사카(大阪)로 끌려갔다.
강항은 일본의 고승들과 사귀며 붓글씨로 경전(經典)을 써주고 성리학(性理學)을 가르쳐 주는 등 유교보급에 공을 세워 그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해동강부자(海東姜夫子)란 칭호를 들었다. 반면에 그는 그곳에서 군사, 지리등의 정보를 몰래 기록하여 인편을 통해 우리나라로 보내오기도 했다. 1598년, 경도(京都)로 이송 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막부(幕府)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석방을 호소했다.
우리 열 식구를 공짜로 먹여주니 당신들에게 이익 될 것 없고 4년 동안 외롭게 감힌 몸이니 나에겐 죽기보다 못하오. 十口空養 爾無所益 십구공양 이무소익 四年孤囚 我不如死 사년고수 아불여사
강항의 글 솜씨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1600년(선조33) 강항은 포로의 몸에서 석방되었다. 포로 30여명과 함께 돌아왔다. 이때도 강항은 경도에서 수집한 군사, 지리 관직, 제도 등 여러 가지 정보를 가지고 돌아와서 조정에 바침으로써 많은 칭찬을 받았다.
또 강항은 포로 생활 중에 쓴 기록들을 모아서 간양록(看羊錄)이란 책을 만들었다. 본래의 제목은 건거록(巾車錄) 이었는데 문인들에 의해 『간양록』으로 바뀌었다.
귀국 후 대구교수(大邱敎授), 순천교수(順天敎授)등의 벼슬이 내렸으나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고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연구와 인재 양성에 전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