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임(한국영상제작학회 명예회장)
학서재법 기묘재인(學書在法 其妙在人)이란 말이 있다. 서예를 배우는 길은 그 기법을 익히는 데에 있으나 그 글씨의 절묘(絶妙)함은 각자에게 달렸다는 뜻이다. 학서(學書)란 글이나 글씨를 배우는 것이다. 여기서는 서예공부를 가리킨다. 법(法)은 일반적인 서예의 기법(技法)을 가리키는 것이고 인(人)은 글씨 쓰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서예의 기법[technique]은 누구에게나 전수될 수 있지만 그 절묘[exquisite]함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 절묘함은 반드시 가슴속에서 혼자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는 것이다. 글씨 쓰는 이들이 밤낮으로 종신(終身)을 집중해 옛사람들이 남긴 기법을 베끼고 모방(模倣)하여 글씨의 모든 획이 세밀한 데까지는 비슷하나 고금의 절묘함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절묘함은 기법 자체에 달린 것이 아니고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예(書藝)에 능하려면 먼저 기본 필법(筆法)을 차례대로 충실히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 과정을 무시하면 일정한 수준에 이를 수 없다. 그 다음이 문제다. 개성(個性)이 없이는 곧 한계에 부닥치기 때문이다.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수준으로는 절묘함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심득(心得)과 독창(獨創)으로 남다른 경지를 개척해야 하는 이유이다.
서예뿐이 아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특히 경계할 것은 스스로 총명하다고 생각해 기본을 익히기도 전에 억지로 남다른 경지를 구축(構築)하겠다고 서두르는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상누각(砂上樓閣)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사상누각의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심득의 길을 가야하고 독창의 길을 가야 한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그 경지(境地)를 가야 되는 것이다. 그 경지를 넘어서야 되는 것이다.
심득이란 깨우침이다. 그런데 그 깨우침은 단순한 깨우침이 아니다. 달관(達觀)의 경지를 넘어서는 깨우침이다. 체득(體得)의 길을 넘어서는 깨우침이다. 단순한 깨우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달관의 경지를 가는 수련(修練)과 체득의 길을 가는 연마(鍊磨)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뼈를 깎는 고통과 노력을 감내(堪耐)해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3년 아니 10년은 갈고 닦고 매만지면서 몸으로 익혀야 심득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진위(眞僞)를 가릴 수 있는 안목(眼目)이 생기는 것이다.
이처럼 심득은 지식(知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몸으로 부대끼고 손으로 익히는 가운데 일과 몸이 하나가 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사일체(身事一體)가 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나치면 헐거워지고 모자라면 뻑뻑해지고 하는 것이 수레공이다. 그것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직접 해봐야 하는 것이다. 직접 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한두 번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수 없는 시행착오(施行錯誤)를 거친 후에나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깨닫는 것이 바로 심득이다.
독창이란 모방을 뛰어넘는 것이다. 베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독창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심득 연후에 떠오르는 것이다. 분서(焚書)와 장서(藏書) 후에나 떠오르는 것이다. 분서란 응축된 지식을 담은 책을 읽고 나서 불태우는 것이고 장서란 방대한 지식을 담은 책을 독파(讀破)한 후에 묻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에 얽매이면 독창이란 씨앗을 잉태(孕胎)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뛰어넘어야 절묘한 경지를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서재법 기묘재인(學書在法 其妙在人)이란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예술은 창작(創作)이요, 창작은 고뇌(苦惱)의 산물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한다. 고뇌란 쥐어짜는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idea)가 떠오를 때까지 자신의 머리를 쥐어짜는 것이다.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것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창작은 그러한 것이다. 독창은 그러한 것이다. 고뇌 없는 창작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고뇌하는 순간 창작으로 넘어가는 것이고 독창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독창(獨創)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고 심득(心得)을 마음에 새기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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