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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모씨 내외. | 46년여간 교육계에 몸담아 온 이현모씨. 무궁화 1호 위성 발사때 팀장으로 활약한 유평일 박사 등 수많은 제자들이 매년 그의 집을 방문할 정도로 그의 교육관에 매료된 제자들의 수를 헤아릴 수 조차 없을 정도다. 현대판 맹모삼천지교를 통해 현재의 자신이 있을 수 있었다고 말하는 이씨는 어머님에 대한 애틋한 정으로 효 교육을 이끈 선구자로 명성이 높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효’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 준 학자.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한 면에 담아내기에는 너무 화려하고 값진 인생이다.
‘효자가 되겠습니다’ 효 교육의 선구자로 명성 자자 스승이자, 친구인 어머니의 ‘현대판 맹모삼천지교’
▲이현모는 누구인가 69년 간의 내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제2차세계대전, 8·15해방, 6·25 동란, 5·16 쿠테타, IMF 경제파동 등 수 많은 민족사를 겪으면서 글자 그대로 가시밭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6남매 중 오직 나 하나만을 키우신 어머님의 품 속에서 온실의 꽃처럼 살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내 일생은 어머님의 사랑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기나긴 반세기를 오로지 교육만을 위해 헌신 봉사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님께서 내가 교단에 서는 날 사랑의 교육을 실천하는 자세를 가르쳐 주시고 희생적인 모성애로 이끌어 오셨으며, 나를 아끼고 돌봐주신 모든 분들의 사랑과 격려에 힘입은 덕택이라 하겠습니다. ▲어머님의 가르침 “사람은 서로 사귀되 의리가 있어야 하고 은혜를 입으면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단다. 그리고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는 기지를 발휘하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줄 알아야 한다” 어머니께서 늘 하시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인지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은을 하고 은혜를 베풀려고 노력한 바도 어머님의 가르침에 순종한 바가 아닌가 생각되어지기도 합니다.
▲현대판 맹모삼천지교 대통령감이라고 마을의 칭찬이 자자하던 내동생 관모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나는 이씨 문중 종손의 도리를 다하고자 읍내 포천초등학교 거쳐 서울에 있는 경기중학교에 입학시험을 보러가게 되었습니다. 특히 잊지 못할 일은 맹모삼천지교에 버금가는 이사를 하셨다는 점입니다. 내 위로 두 누이를 전염병으로 잃고 내 아래로 아들인 관모와 누이동생을 잃게 되자 어머니는 나의 건강과 교육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아들을 좀더 바르게 키우기 위한 행보를 연구하시고 실천하셨던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양지 바른 샘말에서 다시 읍내로 다시 서울로 세 번 이사를 하며 삼천지교를 실천하신 것 입니다. 이렇듯 어머니의 나를 위한 정성은 지극하셨습니다. 양지 바른 양짓말에서 밝은 햇빛을 받으며 건강하게 자라고 읍내에서 군청을 바라보며 관공서 사람들에게 나라 살림하는 모습과 공익을 배우고 다시 서울에서는 학교 정문앞에 하숙을 시켜 학문의 길을 걷도록 그야말로 현대판 맹모삼천지교를 몸소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경기중학교 낙방 기도 서울 경기중학교의 낙방은 나에게는 큰 좌절을 안겨주기도 하였습니다. 놀라운 일이 숨어 있어 낙방을 하게 되었으니 크게 웃을 일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를 크게 염려하시고 건강하고 장수하게 키우시려는 숨은 정성이 읽혀지는 바가 있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게 하기도 합니다. 다름이 아닌 어머니의 경기중학교 낙방 기도였습니다. 경기중학교는 전국의 몇 개 안되는 교내 풀장이 있었습니다. 마을 연못에 가서 헤엄도 못치게 하시던 어머니로서는 참기 어려운 떨리는 마음이 가슴을 죄었다고 합니다. “하느님, 제 자식 ‘현모’를 이 곳 경기 중학교 입학 시험에서 낙방을 하게 해 주십시오. 하나뿐인 제 자식이 만약 이곳 경기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면 저 크고 깊은 풀장에 빠져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 굽어살피시사 제발 제 자식 독생자 ‘현모’를 낙방시켜 주신다면 경기 중학교가 아닌 풀장이 없는 다른 중학교로 입학을 시키겠습니다” 어머니의 풀장 익사 공포로 인한 낙방 기도 탓인지 나의 실력이 부족한 탓인지는 몰라도 나의 한국 제일의 경기중학교 입학시험 결과는 낙방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서울사범학교에 입학을 하려고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경기중학교 입학시험 합격이 어머님의 기도로 무산된 이야기를 하노라면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그래서 나는 7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수영을 한번도 못해보고 평생을 보냈습니다.
▲평생 한 번 뿐이었던 체벌 서울사범학교 병설중학교 시절에 나로서는 평생 처음 당하는 잊지 못할 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남들은 예사로운 일이라고 웃어 넘길 일이겠으나 나로서는 정말 큰 사건이었습니다. 하루는 미술 시간이었습니다. 학교와 집이 가까운 관계로 혹시라도 학용품을 빠뜨리고 등교하더라도 노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잠시 집에 들러 학용품을 챙겨 가기도 하고 문방구에 들러 사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날 따라 미술시간에 미술 도구를 챙기는 것을 잊고 등교하였는데 노는 시간에 집에 와서 다시 챙겨가야하는 것을 노는데 정신이 팔려 깜빡잊고 미술시간을 맞게 되었습니다. 후회한 들 시계를 돌려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미술 선생님이시며 담임선생님이신 류경채 선생님은 미술 도구를 준비해 오지 않은 학생 몇 명과 함께 나를 교단 앞으로 불러내어 세우더니 반 아이들이 주시하는 앞에서 뺨을 세차게 몇 대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평생을 남에게 맞아본 일도 없고, 단 한 대도 때려본 일도 없는 나로서는 일생 일대의 대사건이며 일생의 단 한번 뿐인 폭력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 단 한 차례도 남을 구타한 일이 없고 맞아 본 일도 없는 나에게 서울사범병설중학교 미술 선생님은 격정의 순간을 안겨주신 분이셨습니다. 나는 그날 하루 온종일 울기만 하였습니다.
조선족 신안소학교와 자매 결연
교장재직시에도 연구수업자처 어머니는 물론 누구한테도 맞아 본 일이 없는 나는 분해서 밤잠도 못자고 울기만 하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 나는 무슨 일을 하든 철저하게 습관적으로 준비태세를 갖추게 되었으며 아울러 내가 교사가 된다면 절대로 학생들을 매로 다스리지 않고 사랑과 대화로 가르치고 따뜻이 보살피겠다는 결심을 하고 또,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만일 사랑의 매을 들더라도 나와 같이 매를 맞고 울지 않는 나약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수복후의 졸업 - 첫발령 수복수 졸업 당시 나는 우등상을 받았기에 성적이 좋은 사람은 모든 교사들이 가지 못해 애쓰는 ‘특A급’ 학교로 발령이 난다고들 하여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친구들도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발령장을 받고 난 나는 실망하였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선호하던 수송, 장충, 덕수 등 특A급 학교로 발령이 났는데 나는 서울숭인초등학교로 발령이 난 것입니다. 친구들한테 발령교의 위치를 물어보니 모두 동대문구 숭인동에 있다고들 하여 동대문 구청 학무과로 그래도, 희색이 만면하여 발령 신고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인사를 받고 난 학무과장은 성북구청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미아리는 내가 고향 포천을 오갈 때 항상 지나 다니는 곳이였기 때문에 썩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공동묘지가 있고 상여가 다니고 교통이 불편하며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직 첫 발령을 받은 어린 마음이라 기대에 어긋나 실망이 매우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숭인학교에서 어린이와 함께 하는 희생적인 교육활동을 펼친 덕분으로 지금 많은 동료들이 부러워 하는 훌륭한 제자들을 배출하였고 나에게 보람과 기쁨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MBC 시사매거진 2580에 방영 어느날 MBC TV 방송국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급식실을 짓고 있은 것에 대해서 대담을 하고 취재를 할 텐데 응해 주겠냐는 것이었습니다. 두 말 않고 어서 오라고 쾌히 수락했습니다. 그날 오후 대담시에 우리 학교는 학부모님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아무 잡음없이 잘 이루어지고 있으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학부모들께서 각자 보유하고 있는 설계, 설비, 전기 등의 기술을 동원하여 무상으로 지원해 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습니다. 며칠 후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방영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학부모들이 불평불만으로 아우성치는 신림동 모 학교의 장면을 비추더니 그 반면에 이렇게 학부모와 학교가 협조가 잘 이루어져 훌륭하게 급식실을 잘 짓고 있는 학교도 있다고 하면서 우리학교 모습과 나하고 대담하는 모습이 비춰졌습니다. 이로 인해 나는 일약 유명(?)해 졌고 이 방송을 본 동료나 친지들이 참으로 훌륭한 일은 한다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이는 우리 학부모님들이 하나가 되어 불평불만 없이 너도나도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신 결과라고 한산교육통신과 가정통신문을 통해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올렸습니다. 나는 급식실이 완공된 후 급식업자 선정과 식단작성에도 신경을 써 한점의 의혹이 없도록 투명성과 공정성을 발휘하였으며, 어린이들의 건강 증진을 위한 식단작성을 위해 영양사나 조리사 자격증이 있는 학부모님들을 초빙하여 식단검토위원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활용하고 있습니다. 조리사는 외부인을 쓰지 않고 전원 학부모님들 가운데서 뽑아 채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내 자식이 먹는 음식이니까 온갖 정성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자매학교 결연 어느날 공문이 왔습니다. 중국 길림성 용정시에 있는 조선족 학교인 신안소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기를 희망하는 학교는 신청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역사 공부를 할 때 중국의 광활한 만주벌판이 우리 조상님들이 활거했던 옛고구려, 발해의 땅이었다는 공부를 하고 격분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즉시 자매결연 신청을 하였습니다. 잃었던 옛고구려, 발해시대의 땅을 되찾아 보겠다는 황당무계(?)한 꿈 때문이었습니다. 즉 ‘고구려와 발해’ 땅에 우리의 얼을 다시 심는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만주땅에서 살고 있는 고구려 유민들에게 우리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해외동포들에게 한민족의 긍지를 심어주며 우리 한산학교 어린이들에게는 옛고구려 땅에 우리의 얼을 심고, 문화적으로 잃은 땅을 되찾겠다는 정신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이에 중국 길림성에 있는 용정시 교육위원회 김영욱 부교육감을 비롯하여 용정시 신안소학교 손인숙 교장, 이인섭 교감(공산당 서기) 등을 초청하여 96년 4월 5일 자매결연식을 갖고 조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지역사회 어머니회 및 학부모단체가 주축이 되어 중국서 온 동포들을 있는 정성을 다해 환영해주었습니다. 진로, 맥주공장 등 생산공장 견학, 시내, 고궁 및 유적지 관광, 쇼핑, 열린수업 참관 등 자원봉사학부모들이 당번제로 돌아가며 이들을 안내하였으며 숙박과 숙식도 학부모님들이 지원하여 호텔 장급 여관 등에 돌아가면서 숙박시켜 주셨고, 식사도 양식, 한식 등 고루고루 조화롭게 대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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