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건의 본관은 행주(幸州). 호는 청파(靑坡).
세종때 학식과 덕망이 높아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일약 지평(持平)이 된 후 전라관찰사로 전주부윤을 겸임하였으며 이어 개성유수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한 명신이다. 단종 때 벼슬을 그만 두었는데 세조가 그를 등용하고자 다섯 번이나 찾아갔으나 청맹(靑盲 : 눈뜬 장님)이라는 핑계로 세조에게 불사하여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충절을 지키었고 재직시에는 청렴한 문관이었다.
기건은 성품이 청간하고 세밀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평민으로서 발탁되어 화려한 관직을 역임하였다. 기건은 오랫동안 선비로서 재야(在野) 했기 때문에 백성의 일상생활을 깊이 체험하여 이해하고 있었다.
연안부사(延安府使)로 있을때 백성들이 남대지(南大池)에서 붕어를 잡아다가 바쳤다. 그는 백성들이 농무에도 바쁜데 부사를 위하여 붕어를 잡아 바침은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폐가 된다고 생각하여 먹지 못한다 하고 재임 삼년간 이를 먹지 않을 뿐 아니라 술도 못한다고 하면서 먹지 않았다.
체임되어 떠날 때 연안 부로들이 전별연을 베풀자 그제야 술을 마셨다. 이것을 본 백성들은 부사가 백성을 위하여 술까지 안 마셨다는 것을 알았다.
또 그가 제주목사로 갔을 때는 전복을 잡는 해녀들이 춘하추동 깊고 차가운 바닷물에서 수고하는 것을 생각하고 백성들의 폐가 될까 보아 여기서도 3년간 전복을 입에 대지 않았다.
이와같이 그는 목민관으로 항상 백성을 생각하고 어루만지며 관물을 사사로이 쓰지 아니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청백한 지방관으로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기건이 단종 때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으면서 수양대군이 궁중을 무단 출입하여 정사에 간섭하자 단종을 보호하기 위해 대담하게 이를 금하는 금분경안(禁奔競案)의 소를 올려 조야(朝野)에 큰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그 후 기건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고 조정을 전정(專政)하여 정계가 어수선해지자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수양대군은 그 같은 청렴근면하며 유능한 사람을 잃을 수 없다고 여기고 그를 등용하고자 다섯 번이나 기건의 집을 찾아갔으나 청맹이 되었다면서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완강히 거절하였다.
의심쩍게 생각한 세조는 기건이 정말 청맹인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바늘을 가지고 눈을 찌르려고 하여도 눈을 깜짝거리지도 않고 눈을 똑바로 뜬 채 피하지 않아 훌륭한 충신이라 하면서 그냥 돌려보냈으며 다시 등용시키지 못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나아간 후에도 그를 아껴 등용하고자 한 것은 그가 청렴하고 유능한 인재임을 알았고 충의로운 그의 인품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그가 죽은 후 정무공(貞武公)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충절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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