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효종(한국한시협회 포천지회장)
본관은 칠원(漆原). 1471년(성종 2) 식년문과에 급제. 직제학(直提學) 역임.
연산군 때 사간원(司諫院) 언관(言官)으로서 동료를 거느리고 바른 말을 올렸는데 그 말의 내용이 강경하고 간절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별일 없이 넘어갔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윤석보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고 하여 소급하여 죄를 물어 강음(江陰)으로 귀양갔다.
주위 사람들이 그 당시 동료들 가운데 죽은 사람이 많으니 당시 상황을 죽은 사람이 주로 하였다고 돌리면 죄를 면할 수 있다고 하니 윤석보는 “나도 이 세상을 떠날 날이 멀지 않았는데 어찌 차마 저승에 간 사람에게 죄를 돌리리요. 설령 이로 인하여 죄를 면한다 하더라도 무슨 낯으로 이미 죽은 사람을 만나겠는가?”하면서 거절하고 귀양길에 올랐다. 인간으로서 양심을 숨김없이 잘 보여준 곧은 성품을 짐작케 한다.
윤석보의 청렴한 성품은 그의 관직생활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일찍이 풍기군수가 되었을 때 부임하면서 사내 종 1명, 여자 종 1명만을 데리고 갔다. 부인과 아들은 풍덕(豊德) 본집에 남겨 두었는데 생활고로 배고픔과 추위를 겪으면서 살았다. 그래서 부인 박씨는 하는 수 없이 밭갈이해서 먹고살기 위하여 대대로 집안에 전해오는 보물과 비단옷을 팔아서 토지를 샀다.
이 소식을 들은 윤석보는 속히 집으로 편지를 보내어 새로 산 토지를 돌려주라고 하고 “옛사람은 관직에 있으면서 한치의 땅이라도 넓혀서 그 임금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나는 대부(大夫), 즉 군수가 되어 국가로부터 녹(祿)을 받아먹으면서 토지를 사서 둘 수가 있겠는가? 백성들과 서로 물건을 팔고 사고해서 나의 죄를 보태지 말라”고 하였다.
남편으로부터 이 같은 말을 들은 부인 박씨는 하는 수 없이 새로 사들인 밭을 돌려주었다.
그 후 윤석보가 성주목사(星州牧使)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부인이 임신 8개월이나 되었는데도 가마를 타지 않고 말을 타고 가게 할 정도로 청렴하였다.
이러한 가난한 생활을 본 부인 박씨의 아우인 박중간(朴仲幹)이 상주목사로 있을때 소금을 조금 보내 주었는데 윤석보는 즉시 그것을 돌려보내고 말았다. 이때 윤석보는 그 소금을 받는 것은 자기의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현감이나 목사가 되면 자기 생활의 사치는 물론 치부적(致富的)인 오리(汚吏)가 많았는데 윤석보는 그 같은 탐욕의 태도는 전혀 볼 수가 없고 오히려 자기 봉급을 받는 것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해 나간 보기 드문 청백리였다.
중종반정 후 신원되고 동부승지에 추증되어 염근리(廉謹吏)에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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