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g)
지금까지 생태학에 대한 논의의 주된 초점은 쏘로우(Henry David Thoreau), 리어폴드(Aldo Leopold), 오스틴(Mary Austin), 애비(Edward Abbey), 스나이더(Gary Snyder), 러브(Glen Love), 뷰얼(Lawrence Buell) 등에 이르는 심층생태주의자들이 견지하고 있는 야생자연 속에 흐르는 내재적 가치에 집중되어 왔다. 그런데, 대지중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심층생태주의자들의 무목적론적 인식은 결국 문명세계와 단절될 수밖에 없는 한계성을 노출한다고 볼 수 있다. 심층생태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야생자연은 시골의 한적한 풍경의 공간으로, 반대로 산업문명은 도시의 삭막한 거리로 도식화 될 수 있다. 심층생태주의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방향이 자연과 인간 사이에 성립된 기존의 획일화된 이분법을 타파하는 것인데, 역설적으로 심층생태주의자들이 희구하는 근본주의적 자연관은 기존의 이분법적 자연관을 더욱 고착화시킬 우려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심층생태주의자의 이상적 꿈은 지구상에서 결코 실현될 수 없다”고 단언한 조나단 베이트의 주장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자연의 야생성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재고하여 도시의 일상생활 속에서 야생적 자연을 체험하는 인간 개개인의 삶의 공간 속에 흐르고 있는 생태학적 감수성의 고취가 필요하다. 마음의 생태학과 연결되는 이 같은 의식을 통해 도시문화와 녹색경관의 조화로운 공존이 가능할 수 있다. 랜스 뉴만(Lance Newman)은 시골의 야생지나 대도시를 포함하여 모든 자연지형에 지속적인 관심을 강조하면서 “생태비평의 합리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비평관점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야생자연이 도시문명 안에 존재할 수 있고, 반대로 시골의 한적한 자연 속에 도시문화를 얼마든지 가꿀 수 있다. 인간 개개인의 무의식 속에는 전원을 향한 열망이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문명과 동떨어진 야생자연에서만 삶의 심미성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현대인의 실존적 삶 속에서 인간문명과 단절된 야생자연을 고집하는 것은 자연이 함의하는 장소로서의 복합적인 의미를 간과하는 것이다. 기존의 자연과 문명이라는 획일화된 이분법을 탈피하여 대도시에서도 야생자연이 존재할 수 있으며 인간 개개인이 관심을 갖는다면 황량한 도시에서도 얼마든지 야생자연을 가꿀 수 있다. 야생지는 변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생활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자연을 새롭게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장소는 그곳이 어디든지 야생지일 수 있다. 자연과 인간, 혹은 인간과 자연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에서 벗어나 자연과 결부된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도시환경에 관심을 갖고 있는 생태비평가 로렌스 뷰얼(Lawrence Buell)은 『위험에 처한 세상을 위한 문학』(Writing for an Endangered World)에서 “인간이 생태중심주의로만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어느 누구든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장소와의 관계 속에서 심미적 태도나 느낌을 통해 자기실현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생태주의자들이 펼치는 노력은 궁극적으로는 마음의 생태학과 밀접한 상관성을 맺고 있다. 마음의 생태학은 지형학적 특징과 관련을 맺고 있기에 인간 개개인이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의 공간과의 상호관계성에 얽혀 있는 문화와 밀접하게 결부되고 있다. 도시인의 문화적 삶 속에 야생자연을 조화롭게 접목시키는 도심의 갈색풍경에 대한 생태학적 사유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우리가 녹색경관과 갈색경관을 모두 함께 유기적으로 아우르게 될 때 우리의 생태학적 사유의 지평은 한층 더 확장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매일 경험하고 생활하는 도시의 황폐한 공간을 장소로 환원하는 노력과 함께 주변환경 속에 녹색공간을 확보하는 노력이 끊임없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생태주의는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는 원시적인 삶을 향한 사유가 아니라 자연을 통한 삶의 본질과 대면하려는 열망인 것이다. 우리가 교외의 한적한 자연 속에 살든, 아니면 도시의 분주한 환경 속에 생활하든 중요한 것은 사람이 제각기 자신의 삶의 공간 속에서 얼마나 만족스런 충족감을 느낄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환경이 적어도 적절한 삶의 장소로 체감될 수 있는 바람직한 길은 아마도 그 속에 적절한 로고스나 도가 형성될 때 일 것이다. 삶의 공간 속에 기본적인 야생자연의 이치가 통할 때 그곳에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이 깊게 흐르고 생태학적 상상력이 충만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어떤 삶의 공간 속에서 생활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공간을 어떻게 생태학적 상상력으로 사유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가 저마다 마음속에 야생자연을 가꿀 때 도시의 황량하고 삭막한 풍경도 얼마든지 심층화된 생태주의의 공간이 될 수 있다. 마음속에 야생자연을 가꾸는 마음의 생태학은 인간 개개인의 일상적인 삶의 방식을 자연의 로고스나 도로 환원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우리가 저마다 자연을 가까이 알고 지내면서 그것과 친숙해 지는 가운데 관찰과 명상의 깊이가 더할 때 우리가 느끼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은 더욱 깊어지고, 우리의 삶의 공간은 한층 더 충만해 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