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별이 떨어지는 소리는 조용하다. 사람이 별을 다는 데는 여간 떠들썩하고 얼마나 시끌법석 야단들인지 모른다. 어찌 사람이 밤에 별이 피고 지는 소리는 못 듣고 사람이 별 다는 소리에만 관심이 많은 걸까. 어떤 시인은 ‘시몬, 너는 낙엽 밟는 소리가 들리는가’라고 말했다. 이상하지만 그런가 보다. 대개 사람들은 농사를 지어 곡식을 먹고 살지만 때로는 소리를 타작(打作)하여 떨어진 파장과 리듬을 먹고 살아가기도 한다. 곡식은 입을 통하여 영양을 섭취하지만 소리의 울림은 귀를 통해 심장으로 흘러간다. 소리가 주는 양식은 혼(魂)의 양식이다. 그래서 소리는 잠자는 영혼(靈魂)을 깨우기도 하며 다시 재우기도 한다. 자연의 언어는 소리며 향기다. 사람은 자연으로부터 소리를 얻어 언어를 배우고 마음의 양식을 살찌운다. 소리가 언어가 되고 나아가 춤이 된다. 소리의 빛깔은 흑백이며 칼라(color)다. 지금처럼 인간의 귀가 소리에 지치고 타락(墮落)한 적도 없다. 총소리에 놀란 인간의 귀는 새로운 소리를 끝없이 갈망(渴望)한다. 인간의 피는 밥과 빛과 소리와 섞여 붉은 물감이 된다. 피는 하나의 생명이지만 물감은 예술이다. 물은 바람을 들고 부딪치거나 추락(墜落)해야 소리가 난다. 나뭇잎 역시 바람을 들고 소리를 낸다. 이슬도 풀잎이 있어야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바람도 가지를 분지르며 소리를 내고 빗방울을 들고 땅에 떨어져야 소리가 된다. 이것이 소리의 미학(美學)이 아닌가. 그날 ‘의정부시무용단’의 ‘이미숙 단장’이 연출한 ‘소리의 미학’은 인간이 절규(絶叫)하는 열창이었다. 시계추가 두들기는 시간의 소리를 초월한 인간의 피와 살을 찌르는 장미가시보다 아프기도 한 열꽃이었다. 불 지핀 석탄에 바람이 가해져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뜨거운 욕정의 숨소리이자 오르가즘이었다. 그 오르가즘은 한 생명을 잉태시키는 경이로운 메아리였다.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소리의 메시지는 인간적 화해이며 하늘과의 또 다른 소통이었다. 인간은 신의 ‘천지창조’의 소리를 영감으로 전해들을 수 밖에 없었다. 신(神)은 말로써 소리를 창조했지만 인간은 어떤 도구로만이 소리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다. 고작 미국의 ‘할리 데이비슨’의 오토바이 소리가 말 달리는 소리라고 하지만 그것은 비슷한 흉내에 불과하다. 소리의 모방은 그다지 감탄하거나 의문하지도 않는다. 자칫 잘못하면 잡음이며 공해가 된다. 그런데 그날의 소리는 우리가 공명(共鳴)한 그대로 흉내도 모방도 아닌 위대한 창조의 소리였다. 양산은 햇빛의 소리를 듣게 하고 우산은 빗소리를 듣게 한다. 사람은 소리의 맛깔대로 기쁨과 울분을 증폭시키며 흥분하기 마련이다. 소리도 사람과 대화하는 일종의 언어의 수단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발견했다. 종다리가 하늘에서 울고, 소쩍새가 뒷동산에서 울듯이 말이다. 악보대로 두들긴 피아노 소리는 이미 예고된 작곡의 표현이다. 물론 ‘두드리go"의 소리가 이미 모의된 메시지의 전달이라고는 하지만 가슴에 와 닿은 느낌의 소리는 피와 살의 홍익(弘益)이자 한울이었다. 마치 창조의 질서이자 영감(靈感)이며 생명탄생의 찬가(讚歌)로 들렸다. 다시 말해 그날의 소리는 막힌 핏줄을 뚫고 게으른 심장을 불러 깨우는 구체적 언어의 채찍이었다. 인간이 소리를 들어야만 말할 수 있다는 아주 간단한 이치를 알고 신명(神明)이 났다. 또한 빛의 소리도 들었다. 빛의 소리는 그림자이다. 빛의 소리는 물체에 흡수되어 항시 그 반대편에 떨어진다. 빛의 소리는 어둠을 밝음으로 키운다. 이처럼 소리와 빛의 위력은 대단하다. 이념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기도 하지만 문화와 문화가 만나게 하기도 한다. 미친 소리는 발광(發狂)이지만 창조의 소리와 움직이는 예술적 율동은 미지의 세계를 불러 보이는 찬란한 예감이자 인간의 행복이다. 소리는 표현의 아이러니이자 예술적 기능의 극치다. 소리가 자연환경과 친화적일 때 비로소 빛과 소리는 인간의 문화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