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익 수 (시인) 딱따구리는 나무에 구멍을 뚫고 둥지를 틀며 나비는 바람과도 집을 짓는다. ‘날아다니는 보석’ 물잠자리는 나뭇가지에서 짝짓기를 한다. 모든 생명은 어디서나 소중하다. 그럼에도 어떤 생명은 살고 어떤 생명이 죽어야 하는지를 인간 스스로가 정해 놓고 오만한 말을 지어내는 것은 불행한 사회 계약이다. 동물이 자연대로 살아감을 인간은 깊이 통찰해야만 한다. 지금 ‘오월의 여왕’ 싸파이어 꽃이 힘살을 돋구어 핀다. 영국의 시인 워드워즈는 종다리를 ‘천상의 시인’ 이라 했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덤으로 새끼를 키운다. 비겁하고 게으른 것 같지만 그것이 자연이고 신에 대한 순종이며 섭리에 대한 복종이다. 생각해 보면 바위틈에 살아가는 풀이 얼마나 경이롭고 대단한가. 그러나 자연 속에도 오묘한 섭리와 아름다운 질서의 생존적 계급이 존재한다. 아인슈타인은 벌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면 불과 모든 생명은 4년밖에 생존할 수 없다고 간파했다. 다행히도 이 땅에 죽어 가는 생명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생명은 서로 이어져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을 두려워하기에 앞서 끈끈한 사랑을 먼저 해야 한다. 자연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친근한 대상이자 관계이다. 인간도 하나의 자연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생명과 물장구 치고 불놀이를 끈질기게 해야 함이다. 하늘에 떠 있는 새의 날개를 보라. 얼마나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조용히 떠 받치고 있는가를. 사력을 다해 날아가는 새가 날개를 부딪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제 갈 길을 가기 때문이 아닌가. 왜 인간은 살과 살을 섞어 생명을 탄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살과 살을 찢어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피를 나눈 인간의 본성에는 원죄가 있어선가. 아니면 어디에 근원을 둔 선과 악이란 말인가. 죄와 벌이란 것인가. 인간은 물로 죄를 씻어가며 자아 성찰을 통하여 피에 싹을 잘라야 함이 옳은가. 사함을 받아야 하겠는가. 소쩍새 소리는 슬프고 까치소리가 반갑게 들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어쩌면 새소리의 악보는 이미 인간의 가슴에 저장된 것이 아닌가. 인간의 귀는 나팔이다. 입을 통하여 소리를 내는 것보다 귀를 통하여 듣는 소리가 더 깊고 멀리 간다. 사월의 마지막 날 흙으로 돌아간 한국의 큰 시인 정공채님은 그의 마지막 시 ‘고별사’에서 인간은 두 번 운다고 했다. 태어날 때 한 번 울고 죽을 때 또 한 번 운다고 했다. 그리고 이 땅을 향하여 사랑한다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흙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인간의 입과 생각으로 부르는 노래는 악보로 그려낼 수 있지만 눈에서 흐르는 눈물 소리는 악보가 없다. 절규하여 피는 꽃의 향기 역시도 악보가 없다. 어떤 면에서 악보는 상상의 문이다. 인간의 타락한 상상력에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악보를 쓰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구속되는 것이다. 만들고 없애고 열고 닫고 하는 문은 반드시 경계와 울타리를 붙잡고 있기에 그렇다. 넓은 운동장의 트랙을 따라 사람은 두 팔을 벌려 달리지만 그 역시 운동장에 갇힌 것이며 선에 묶이는 것이다. 그래서 구속에는 물리적 구속과 정신적 속박이 있음이 그것이다. 남편이 아내의 대문을 열쇠로 채우는 것도 구속이지만 “일찍 들어와” 라고 하는 이 말은 그보다 더 무겁고 무서운 구속이 된다. 때로는 악보 없는 인간의 소리가 공포와 두려움의 공해가 될 때도 있다. 또한 아내의 바가지 긁는 소리가 악보가 없듯이 동산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도 악보가 없다. 동물(생명)의 소리(언어)가 그러하듯이 진정한 생명의 예술이란 약속을 통한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이며 생각의 부화인 것이다. 어쩌면 무지개의 언약일수도 있다. 나뭇잎이 바람과 노래하며 춤추며 우는 일이 그러함이다. 바로 인간의 악보는 파라다이스(낙원)를 찾아가는 길에 인간이 놓는 철길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