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觀察)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통찰(洞察)이란 말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찰이란 무엇이고 통찰이란 무엇인가? 관찰이란"눈에 보이는 것을 관심(關心)을 가지고 보는 것"이고 통찰이란"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우리가 신문을 볼 때 흔히 행간(行間)의 의미(意味)를 읽으라고 한다. 쉽게 말해 신문의 기사(記事)만 읽으면"관찰"에 머무는 것이고 행간의 의미까지 읽으면 "통찰"에 이르는 것이다.
"관찰"이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다. 관심(關心)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관심"을 가져야 한다. 관심이 없으면 눈에 들어와도 그것을 제대로 인식(認識)하지 못한다."마음"이 없으면 실체(實體)가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지나치고 말기 때문이다. 스쳐 가는 그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마음"이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마음"에 두어야 하는 이유이다. "관심"이 중요한 이유이다.
우선은 관찰력(觀察力)을 키워야 한다. 관찰력을 키우려면 기록(記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냥 보고 지나치거나 듣고 지나가면 소용이 없다. 그 때 뿐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감감해지기 마련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강의(講義)를 들을 때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이는 사람은 강의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다. 새로운 용어(用語)가 나오거나 새로운 표현(表現)이 나오면 그것을 메모하면서 들어야 한다. 듣는 것은 그 때뿐이나 메모는 영원(永遠)히 남기 때문이다 (hearing is forgettable, writing is unforgettable).
기록(記錄)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 기록을 정리(整理)하고 체계화(體系化)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내면화(內面化)시켜야 한다. 체계화로 끝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자신의 지식(知識)으로 만들어야 한다. 자신의 지식으로 쌓아나가야 한다. 축적(蓄積)된 지식체계(知識體系)를 만들어 가야 한다. "축적된 지식체계"가 말해주기 때문이다. 축적된 지식체계로 평가(評價)받고 축적된 지식체계로 경쟁(競爭)하기 때문이다.
"지식체계"가 쌓이면 자연 통찰력(洞察力)이 생긴다. "관심"을 가지고 내면을 응시(凝視)하기 때문이다. 응시란 무엇인가? 응시란 명상(冥想)의 다른 표현이다. 응시란 일종의 명상이다. "명상"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달라이 라마도 말했다. "두 가지를 규명해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인간 의식(意識)의 규명(糾明)이고 다른 하나는 몸의 내적인 성숙으로서 쿤달리니(丹)의 각성(覺醒)이다." 의식의 규명은 "명상을 통한 깨달음"이고 쿤달리니의 각성은"명상을 통한 에너지의 전환"이다. 명상(冥想)만이 인류를 구제하고 서로 평화(平和)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할 수 있는 기본이요 필수조건이란 설명이다.
"명상"을 통해 통찰력(洞察力)을 키워야 하는 이유이다. 기사(記事)만을 보지말고 행간(行間)의 의미(意味)를 읽을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 이유이다. 현상(現象)만을 보지말고 본질(本質)을 살피는 습관을 키워야 하는 이유이다. 현상을 어떻게 파악(把握)하고 있느냐? 본질을 어떻게 이해(理解)하고 있느냐? 항상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이기(理氣)의 문제를 함께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기"의 세계를 함께 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관(止觀)을 함께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란 멈추는 것이다. 선(禪)의 세계에 드는 것이다. "명상"에 드는 것이다. "지"가 왜 중요한가?"지"에 들 때 각(覺)이 오기 때문이다. 깨우침이 오기 때문이다."관"은 보는 것이다. 깨우침을 보는 것이다. 우주와 내가 하나라는 우아일체(宇我一體)의 깨우침을 보는 것이다. 그 경지(境地)는 그냥 가는 것이 아니다."명상을 통한 수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