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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까맣게 타버린 農心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7년 05월 23일

 

윤순옥(포천의제21협의회 고문)


봄비가 예쁘게 내리고 있다. 정성을 들여 싹 틔어온 새싹들이 생명수를 흡수해 여린 잎이 곱기도 하다. 어릴 적 봄비만 내리면 어머니께서 힘든 농부들 쉬라고 잠비가 내린다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지친 육신을 비 내리는 날에야 따뜻한 아랫목에서 단잠을 즐기시던 부모님 모습이 기억 속에 새롭다. 농사일이 기계화되어 수월해졌다지만 하기 좋은 말뿐인 것 같다.


얼마 전 철원 작은집에 고추모를 3천대나 심는다고 하기에 일손을 덜어줄까 하는 대견한 마음으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이른 아침 밭에 도착해 비닐 위에 뚫어 놓은 작은 구덩이마다 한 포기씩 심는데 한 시간쯤 지나니 허리도 쪼그린 다리도 허풍을 떨자면 기절하기 직전인 것 같았다.


농사일에 이골이 난 시동생 내외는 못 따라가도 손놓고 쉴 수 없는 입장이 아니던가. 한 포기를 심어도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미리 씌워놓은 비닐 위 곳곳이 찢어져 있어 의아했는데 산돼지가 뛰어다닌 발자국이라고 한다. 밭가에 빙 둘러 쳐져 있는 보호막이 있는데도 그 지경이니 애타는 농부의 마음을 까맣게 숯덩이로 만들고 있다.


옥수수밭이며 감자밭, 이 모든 농사를 돼지가 먹고 난 다음에 남는 것이 수확이다. 기가 막혀 이런 농사 어떻게 짓느냐고 했더니 사람 좋은 농부님 왈 "그래도 우리 먹을 건 남겨놔요" 하며 편안하게 씩 웃는 모습이 천사의 미소 같다.


하기야 의사소통이 안되는 야생동물에게 분통을 터트려 봐야 소용은 없지만 말이다. 생명이 소중하다고 해도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돼지는 잡아야 할 것 같다.


새벽부터 서두른 일은 점심때가 조금 지난 무렵에야 마무리됐다. 이제 혹독한 훈련 뒤에 즐기는 식사니 메뉴에 상관없이 꿀맛이다. 밥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집으로 도망치듯 돌아와 샤워하고 단잠에 취해 버렸다.


이튿날 철원에서 전화가 왔다. 안 하던 농삿일에 몸살은 나지 않았는지? 대답은 당당하게 "그깟 일로 무슨 몸살이 나요. 끄덕 없어요" 다행이다 싶어서인지 껄껄 웃더니 "그런데 그 놈의 돼지가 고추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야말로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놈의 돼지 총을 구해 잡으러 가야겠네요" 핏대가 오른 내 목소리가 나도 놀라게 했으니 시동생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군청에서 사살해도 된다고 연락은 왔지만 무슨 수로 돼지를 잡나 하는 안타까운 목소리가 너무도 마음 아파 하루종일 손에 일이 잡히질 않는다.


고추 3천대 묘목 값이며 비닐, 거름 등 따지다 보면 머리 아파 무슨 일 날 것 같다. 농사일에 위기가 너무도 험난한데 야생동물까지 농부의 마음을 할퀴다니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막막하다. 또 가보지는 않았지만 시동생 말대로 돼지가 휩쓸고 가도 먹을 것은 남겼는지 막연한 기대에 마음을 달래본다.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7년 0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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