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권(人權)과 인성(人性)이란 말이 화두(話頭)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인권이란 무엇이고 인성이란 무엇인가? 인권이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생명 자유 평등 같은 것에 관한 ‘기본적인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성은 ‘사람의 성품(性品)’을 말하는 것이다. 성질과 됨됨이를 말하는 것이다. 품격(品格)을 말하는 것이다. 인성을 말하면 아울러 인격(人格) 말하게 된다. 인격이란 말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하나는 말이나 행동에 나타나는 ‘품격’을 말하는 것이고 둘은 법률(法律)에서 이르는 권리나 의무의 주체가 되는 ‘자격(資格)’을 말하는 것이다.
혹자는 묻는다. 인성이 먼저인가? 인권이 먼저인가? 물론 인권과 인성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게 있다면 인성은 길러야 하는 것이고 인권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인성은 자라면서 길러야 하는 것이다. 높여야 하는 것이다. 수양(修養)을 통해 성품을 높여야 하는 것이다. 인격도야(人格陶冶)를 통해서 그 격을 높여야 하는 것이다. 품격을 높여야 하는 것이다. 인권은 지켜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무엇을 지켜주는가? 규약(規約)을 지켜주는 것이다. 조례(條例)를 지켜주는 것이다. 서로가 존재를 인정하고 그 선을 넘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다. 침해받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다.
인권을 말하기 전에 사람의 도리(道理)를 말해야 한다. 도리를 다 한다면 인권을 말하지 않아도 존중(尊重)받고 대접받는다. 사람이 도리는 다하지 않고 인권만 내세우기 때문에 눈총받는 것이다. 도리는 제쳐두고 인권만 주장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살벌한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야만(野蠻)의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인격은 존중돼야 하고 인권은 지켜져야 한다. 도리를 뒤로 하고 인권을 앞세우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는 것이다. 임금이 폭군으로 변한다면 어찌되겠는가? 신하가 간신(奸臣)이 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충담(忠談) 스님이 말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백성은 백성다워야 한다’고 간언(諫言)했다. 그리되면 태평성대(太平聖代)는 저절로 오는 것이라 했다. 인권은 상대를 의식(意識)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나는 잘하는데 상대가 못하기 때문에 문제라는 인식(認識)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 자신을 성찰(省察)해야 한다. 왜 인권을 말하고 조례를 말하고 규약을 말하는지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나라를 위한 것인가? 당리앙략(黨利黨略)을 위한 것인가? 사회전체를 위한 것인가? 개인의 영달(榮達)을 위한 것인가? 양심에 물어야 한다.
요즘 세상을 보면 ‘탐욕의 언어(Greedy talk)’와 ‘비난의 언어(Blame talk)’만 난무한다. 게걸스러운 탐욕(貪慾)의 언어들만 춤춘다. 또 전부 남 탓이다. 자기는 책임 없다는 거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관계는 단절(斷絶)시킨다. 내가 ‘책임 주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나라가 어찌 되어가던 상관 않는다. 그래서는 안 된다. 사회 윤리(倫理)와 개인 윤리를 늘 함께 고민해야 한다. 나라가 있어 사회가 있고 사회가 있어 내가 있다는 사실을 절감(切感)해야 한다.
바야흐로 ‘학생인권조례’를 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학생 인권이 아니라 ‘학생 인성(人性)’이 더 중요하다. 배우는 학생들에게 개인이 누릴 권리만을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학교에서는 오히려 개인의 책무를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해야 건전한 시민을 배출할 수 있다. 진보 진영에서 ‘학생 인권’을 내세울 때 교총은 ‘교권(敎權)수호’를 말했다. 둘 다 소중하다. 그러나 롤모델(roll model)이 있어야 그 본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과거 권위주의 시절이 아니다. 더 이상 인권만 주장해서는 안 된다. 먼저 인성을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