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양심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양심도 없는 사람’이라거나 ‘양심은 속일 수 없다’거나 같은 말들을 한다. 그런데 양심에는 양심(良心)도 있고 양심(兩心)도 있다. 良心의 사전적 뜻은 ‘사물의 선악을 구별해 나쁜 짓을 하지 않고 바른 행동을 하려는 마음’이다. 선악(善惡)을 구별하고 바른 행동을 하는 마음이다. 대법원 판례의 규정은 한결 명징(明澄)하다. 뚜렷하다. 良心이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로서 절박하고 구체적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良心이란 자신의 인격적 존재 가치(價値)를 생각하는 것이고 진지(眞摯)한 마음의 소리를 듣고 따르는 것이다. 참되고 착실한 마음과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가 사회적 합(合議)의 성격을 띤다면 양심은 순전히 개인적인 덕목(德目)이다. 개개인에게 부여(賦與)된 착한 심성(心性)이다. 사람이 여느 동물과 다른 이유이다. 짐승과 다른 이유이다. 세상사람 모두를 속여도 자신만은 속일 수 없게 만드는 게 양심이다. 천하가 비웃고 손가락질하는 일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이들을 두고 ‘양심에 털 났다’고 하는 건 그 때문이다.
교묘한 얼버무림으로 진실을 오도(誤導)하는 것은 거짓말과 다르지 않다. 요즘 연일 화면을 뒤덮고 있는 세월호 침몰사건을 보면 ‘저럴 수가’라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정말 양심에 털 난 사람들이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기록돼 있는데도 아니라고 부인하니 기가 막힐 뿐이다. 인간으로서 ‘가치관(價値觀)과 사명감(使命感)’도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만 들뿐이다. 정말 기가 막힌다. 정말 속 다르고 겉 다른 사람들이 아닌가? 인간으로서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양두구육(羊頭狗肉)이란 말이 절로 떠오르는 형국이 아닌가?
그래서 양심이란 말에 ‘두 마음 곧, 겉 다르고 속 다른 마음(兩心)’이란 뜻도 들어있는 것이지 싶다. 兩心이란 두 마음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른 마음이다. 양두구육의 탈을 쓴 마음이다. 입으로는 선한 말을 하면서도 뒤로는 딴짓거리를 하는 마음이다. 그들의 눈에는 돈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안전(safety)이란 말은 눈씻고 봐도 아예 없는 것이다. 그 와중에 젖은 돈을 말리고 있었다는 선장의 행태(行態)가 그 같은 사실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선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배후(背後)가 문제이고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다. 특히 벼슬자리에 있다는 사람들의 의식(意識)이 문제다.
그들이 진정 해야 할 일은 뒷전에 두고 딴 일에만 몰두(沒頭)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을 건성건성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제 할 일을 제대로 했다면 막을 수 있었던 일이란 사실이 우리의 가슴을 더 저리게 한다. 정치한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당리앙략(黨利黨略)과 포퓰리즘(populism)에만 신경 쓰고 민생(民生)은 뒷전이다. 생때같은 우리 아이들이 물밑에서 죽어가는데 설전(舌戰)만 오고가니 통곡할 일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良心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다. 그들도 양심이 있다면 일말의 가책(呵責)을 느낄 것이다. 그들도 자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처다 보는 처자식이 있기 때문이다.
옛 말에 현명(賢明)한 사람은 들어서 알고 똑똑한 사람은 보아서 알고 어리석은 사람은 당해봐야 안다고 했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새겨들을 일이다. 벼슬자리에 앉아 큰 소리 치는 사람들이 새겨들을 일이다. 민(民)을 을(乙)로 보고 갑(甲)의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새겨들을 일이다. 그들이 민을 갑으로 보고 매사에 임했다면 오늘과 같은 참담한 일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우리 앞에 더 크고 무서운 쓰나미가 다가오고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