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석령은 백두산의 ’정간룡(正幹龍)이요. 한양으로 들어서는 골짜기 산의 기세가 축석령에서 크게 머물렀다가 다시, 일어나 도봉산이 되고 골짜기를 지나 다시 일어나 삼각산이 되는데 그 기복(起伏)이 봉황새 날아오르는 듯 하고 용이 뛰어 오르는 듯 하여 온 정신이 모두 왕성(王城), 한 지역에 모여 있다.
산천이 사람의 외모와 그 기색(氣色) 이거니와 아침에 비가 개인 모습 더욱 명랑하고 수려(秀麗)함 깨닫게 한다.
옛날에도 오늘 아침처럼 비가 내리다 개었는데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조선왕조 실록 정조 16년 9월 11일 정미년)
정조는 광릉을 참배하고자 가는 길에 축석령을 넘다가 잠깐 멈춰 서서 위와 같은 시를 지었다. (승지 서영보에게 이름) 내 고향 포천의 첫째 가는 효자 구성공 오백주(吳 伯周)님이 선친의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축수하는 단을 돌로 쌓고 기원을 드렸다고 하여 축석령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또한 명약을 구하러 가는 길에 호랑이를 만나 길을 막자 호통을 쳐서 호랑이를 굴복시키고 호랑이 등을 타고 왕방산 갓뫼봉 옆 바위 틈에 눈물로 덥힌 뜨거움으로 녹아 나온 꿀물(석청)을 얻어 선친의 병환을 쾌유시켰는데 그 꿀에 넣은 산삼은 조경선생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축석령 고개 밑에는 효자 오백주가 호랑이에게 호통칠 때 썼던 효자 바위가 남아 있다.
축석령은 광릉을 참배하러 오갈 때 임금님들이 쉬어가는 고개행적이 있는 산이지만 양주, 의정부와 경계를 이루는 내 고향 포천의 남쪽 관문이기도 하다. 정조임금을 비롯한 조선조 임금님들이 쉬어갈 때 마다 내 고향 포천의 아름다운 산천(山川)을 내려다 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축석령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또, 축석령에는 세종 이후의 조선조 역대 임금님들이 광릉 행차시 포천현민들과의 알현기회가 있었는데 임금님을 알현한 백성들은 모두 신분 상승의 특혜를 누렸으며 6~7명은 대과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포천사람 양반 아닌 사람 없다’는 말이 있어 ‘반다의 고장’이라고 했다)
축석령은 3.1운동 당시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높은 곳에서 만세를 불렀던 곳이기도 하여 유명하다. 정조임금의 ‘시비’나 3.1만세 운동 기념탑이라도 세웠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기도 하다. (‘이제승’ 주간 ‘임관영’ ‘김산동’ ‘김재창’이 편찬한 명저 ‘솔무루 이야기’에 축석령 찬시가 여러편 있어 우리를 기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