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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걸의 플러스에세이 35] 어머니가 남긴 손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9월 28일
< 김종걸 / 수필작가 >

구월이 오면 풍경부터 깊어진다. 아직 볕에는 여름의 온기가 남아 있지만, 아침저녁 바람에는 선선한 가을 냄새가 묻어난다. 들녘의 초록은 제빛을 조금씩 낮추고, 나뭇잎은 그 틈으로 가만히 가을빛을 들인다. 여름을 견뎌낸 것들이 저마다의 색으로 단단히 익어가는 계절이다.

이맘때면 지난해 구월, 기차역 앞 작은 카페에서 만났던 고향 친구 난숙이 떠오른다. 당시 친구는 신장 질환으로 투병 중이었다. 외출조차 쉽지 않았을 텐데, 멀리서 내려온 나를 만나겠다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역까지 찾아왔다. 수척해진 얼굴로도 친구는 예전처럼 환하게 웃었다.

“왔네.” 짧은 한마디에 겹겹이 쌓인 고향의 시간이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코흘리개 시절 뛰놀던 함벽정 이야기와 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해 들어갔던 시내 호빵집 추억을 끊임없이 꺼내놓았다. 뜨거운 호빵을 나눠 먹던 학창 시절을 반추하는 사이 잔 속의 커피는 식어갔지만, 가슴 속 기억은 오히려 따스하게 데워졌다. 그러다 문득, 친구의 깊어진 눈매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서울살이와 생업에 쫓기던 시절이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늘 어머니를 품고 살았지만, 몸은 차마 어머니 곁에 닿지 못했다. 홀로 집을 지키시던 어머니에게 주일은 유난히 길고 적막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긴 하루의 문을 열어준 이가 바로 난숙이었다. 매주 주일이면 어김없이 어머니의 집 문을 두드렸고, 어머니는 친구가 오는 날이면 일찍부터 현관 쪽을 바라보며 기다리셨다. 문밖에서 그리운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을 것이다.

“난숙이 왔구나.”친구는 어머니의 무거운 손을 잡고 천천히 성당으로 향했다. 어머니에게 난숙이는 그저 아들의 친구가 아니었다. 멀리 있는 자식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딸이었고, 외로운 날이면 살갑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말벗이었으며, 걷기 힘든 날에는 기꺼이 튼튼한 팔을 내어주는 지팡이였다.   

성당으로 가는 길, 난숙이는 늘 어머니의 둔해진 걸음에 맞춰 보폭을 줄였다. 계단을 오를 때면 팔을 단단히 받쳐 안았고, 미사가 끝난 뒤에는 다시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이 주일마다 정성껏 걸었던 그 길을 정작 아들인 나는 함께 걸어드리지 못했다. 멀리 있다는 핑계로, 바쁘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외로운 시간을 친구의 어깨에 온전히 얹어둔 채 살았다. 그런데도 난숙이는 단 한 번 생색을 내지 않았다. 자신이 한 일을 그저 당연한 본분처럼 마음에 품고만 있었다.

어머니 역시 그 깊은 마음을 아셨을 것이다. 그렇기에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난숙이를 친딸처럼 의지하셨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나는 문득 자문하곤 했다. 어머니는 과연 내게 무엇을 남기고 가셨을까. 빛바랜 사진과 손때 묻은 물건들, 오래된 기억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귀한 유산이 있었다. 당신이 마지막까지 온전히 의지했던 사람, 난숙이었다. 돌이켜보면 친구는 어머니가 내게 남겨놓은 가장 따뜻한 선물이었다.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사랑은 이렇듯 남은 사람의 손을 빌려 오래도록 살아 숨 쉰다.

그날 카페에서 수척해진 친구의 손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이제는 내가 네 손을 잡아야겠구나.’ 어머니가 친구의 손에 기대어 걸었던 시간이 있었다면, 이제는 내가 그 친구의 곁을 지켜야 할 차례였다. 살다 보면 고마운 마음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가까운 이일수록 감사와 사랑의 표현을 다음으로 미루다가,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뀐 뒤에야 곁에 있던 손길이 얼마나 귀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나는 그날 친구에게 끝내 건네지 못한 말을 마음에 깊이 묻었다.

‘난숙아, 우리 어머니에게 건네준 네 따뜻한 손을 나는 절대 잊지 않았어.’ 올가을에는 아내와 함께 고향에 가려 한다. 어머니가 생전에 사랑하셨던 성당, 그리고 난숙이가 매주 어머니를 부축하며 오르내렸던 그 길을 다시 걸어볼 생각이다. 가을이면 그 길 위에도 바삭거리는 낙엽이 소복이 내려앉을 것이다. 그 길을 걸으며 지나온 세월을 나눌 때, 제단 위에 두 손을 모으면 하늘에 계신 어머니도 미소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시리라. 당신의 외로움을 보듬어주었던 딸 같은 친구와, 뒤늦게 그 사랑을 깨달은 아들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구월의 바람이 창가를 스치고 나뭇잎 하나가 흔들린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잎사귀가 여름의 초록을 내려놓고 제게 찾아온 가을빛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다. 사람의 마음도 저렇게 익어가는 것일 테다. 젊은 날에는 미처 몰랐던 온기를 세월이 마음을 물들인 뒤에야 비로소 알아보듯 말이다.

바람이 다시 분다. 나는 조용히 두 손을 모은다. 친구의 아픈 몸에 평안이 깃들기를, 다시 함께 고향길을 걸으며 소탈하게 웃을 수 있기를, 그리고 이번에는 늦지 않게 고백할 수 있기를. 고맙다고,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어머니가 내게 남겨준 그 소중한 손을, 이제는 내가 오래도록 따뜻하게 잡아주고 싶다.

◀ 작가 김종걸 ▶
○ 격 월간지《그린에세이》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원.

○ 수필집
“울어도 괜찮아”(2024),
“언론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명수필”(2022,공저)

○ 수상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수필부문 우수, 안전행정부 장관상 수상.(2014)
제17회,19회 경찰문화대전 산문부문 우수, 경찰청장상 수상.(2016, 2018)
제4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수필 공모전 우수상 수상.(2021)
제6회 대한민국 다문화 인권문학상 공모전 동상 수상.(2025)

○ 현장경찰로 34년 근무, 경정(警正)으로 퇴직하였다.
재직 중 대통령 녹조 근정 훈장 수상,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 표창,
근무 우수로 경찰청장 표창, 서울특별시장 표창, 서울, 경기지방경찰청장 표창 등
다수 수상하였다.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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