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정신 55]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고려 말 이성계가 정권을 장악하자 정몽주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1392년 3월, 명나라에 갔던 세자 왕석(王奭)이 귀국하려 하자 공양왕은 이성계를 시켜 마중을 나가게 했다.

이성계는 세자를 맞기 위해 일찍 황주(黃州)로 떠났다. 하지만 너무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이성계는 날짜를 맞추기 위해 그곳에서 사냥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사냥 도중 이성계는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말았다.

이성계가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아들 방원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측근인 판전객시사(判典客侍事) 조영규(趙英珪)를 불러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할 뜻을 내비쳤다.

방원은 부상한 이성계를 급히 개경으로 옮기기로 했다. 정몽주 역시 이성계의 부상이 그 일파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정몽주는 왕에게 상소를 올려 개경에 있는 정도전, 조준, 남은, 윤소종, 남재, 조박 등이 충신들을 모함하고 사병을 길러 나라를 위협하고 있다고 논박하였다. 이에 공양왕은 도당(都堂)에 명하여 이들의 시비를 가리도록 했다.

그 무렵 한 승려가 정몽주에게 이런 시를 주었다.

  만리 강남 땅엔 꽃 피었을 터

  봄바람 부는 어느 산인들 좋지 않으리.

정몽주의 앞날을 예감하고 어서 자취를 감추라는 뜻이 담긴 시였다. 시를 받아든 정몽주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ꡒ슬프다, 이미 늦었구나!ꡓ

사태가 급박해졌음을 깨달은 방원은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리고 빨리 입궐하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거동이 불편했으므로 둘째아들 방과를 보내 임금에게 무죄를 아뢰도록 했다. 그러나 공양왕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때마침 정몽주는 이성계의 부상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그의 집으로 문병을 왔다. 방원은 급히 조영규에게 선죽교 아래에 매복해 있으라고 명한 후, 시간을 끌기 위해 문병을 마치고 나오는 정몽주를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방원은 술자리를 베풀고, 은근히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다.

ꡒ평소 포은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습니다. 저와 술잔을 나누면서 시나 한 수 읊어주시지요.ꡓ

ꡒ시골에 묻혀 훈장 노릇이나 하면 족할 위인이 어찌 명문 자제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겠소?ꡓ

그러자 방원은 정몽주에게 술을 한 잔 올리고 나서 말했다.

ꡒ그럼 제가 먼저 시를 읊어보겠습니다.ꡓ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성황당 뒷담이 무너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영원히 살아본들 어떠하리.

정몽주가 화답하는 시를 읊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두 사람은 서로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금새 알아차렸다. 결국 방원과 정몽주는 서로 다른 입장만 확인한 채 헤어졌다.

마침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다. 정몽주는 돌아오는 길에 그의 집에 들러 조문했다. 옛친구의 죽음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정몽주의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우울한 심정으로 돌아오다가 그는 백화점(百花店)이라는 단골술집 앞에 이르자 곧장 말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꽃밭으로 들어가며 주모에게 술을 청하였다.

주모가 술병을 들고 나오자 정몽주는 꽃밭에서 춤을 추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ꡒ오늘 꽃바람이 참으로 고약하구나, 고약해!ꡓ

그는 꽃밭에 앉아 술 몇 잔을  마셨다. 술기운이 거나하게 오르자 그는 다시 말에 올라탔다.

이윽고 길을 떠나는데 활을 멘 무사가 앞질러 가는 모습이 보였다.

정몽주가 따라오는 녹사(錄事)를 돌아보며 말했다.

ꡒ예감이 좋지 않으니 그대는 뒤에 떨어져서 따라오라.ꡓ

ꡒ소인은 대감을 따르겠습니다. 제가 간들  어디로 가겠습니까?ꡓ

정몽주가 재삼 꾸짖으며 말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정몽주가 탄 말이 선죽교 앞에 이르자 조영규가 이끄는 무사들이 숲에서 뛰쳐나왔다. 조영규는 먼저 몽둥이로 그가 타고 있던 말의 머리를 내리쳐서 그를 떨어뜨린 후  곧바로 철편으로 쳐서 죽였다. 그때 뒤따르던 녹사도 정몽주의 몸을 끌어안은 채 함께 죽었다.

정몽주의 시체가 길가에 버려졌지만 사람들은 감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우현보가 이를 비통하게 여겨 은밀히 승려를 시켜 그 시체를 거두어 용인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정몽주(鄭夢周)

1337년(충숙왕 복위6)~1392(공민왕4).

본관은 영일(迎日)이며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임신하였을때 난초 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어릴 때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하였다가 뒤에 몽룡(夢龍)으로 개명하고, 성인이 된 뒤에 다시 몽주라 고쳤다.

1357년(공민왕6)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하여 1362년에 예문관의 검열 및 수찬이 되었다.

이후 문무의 요직을 맡으면서 문명을 떨쳐 이색이 정몽주를 가리켜 ꡐ동방 이학(理學)의 시조ꡑ라 말할 정도였다. 

1376년(우왕2)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인임(李仁任), 지윤(池奫) 등이 주장하던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에 반대하다가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고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영원군(永原君)에 봉해졌다. 그후 삼사좌사(三司左使),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지냈다.

고려 말 정치적으로 문란했던 시기에 그는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훌륭한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기울어가는 고려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확산되고 조준(趙浚),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이들의 음모를 제거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를 눈치 챈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선죽교(善竹橋)에서 격살되었다.  문집으로 『포은집』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