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날짜 : 2026-10-16 오후 09:10:57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원격
뉴스 > 칼럼위원기고

[강경만의 왕릉 이야기 ⑩ - 강릉]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7월 16일
 
< 강경만/ 공인노무사 >
 
1. 강릉답사를 시작하며 (답사일 : 2026. 6. 27)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말하지 않는 것들과의 대화, 작은 걸음 큰 울림 왕릉답사, 태정태세 문단세, 예성연중 인명선! 오늘의 왕릉답사는 조선 중기 명종의 강릉입니다.

불암산이 병풍처럼 둘러 쌓여 육사와 삼육대가 있는 곳, 강릉. 어머니 문정왕후 그늘에 가려 존재감 없었던 중종 아들 명종, 아들도 외롭게 만든 친어머니 문정왕후와 국정농단 세력 윤원형과 정난정 그리고 한류열풍의 신기원을 연 장금이 등등...지금 시작합니다. 

2. 명종 그는 누구인가?

조선 13대 왕 명종하면 그다지 떠오르는 이미지 없이 오히려 그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훨씬 강한 인상으로 와 닿는다. 명종은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로 1534년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왕세자는이복형인 인종(모 장경왕후)이었다. 연산군의 질풍노도의 폭정 때문에 발생한 1506년 반정 직후 중종의 첫 왕비인 단경왕후 신씨(온릉)가 폐위 되면서 중종계비가 된 장경왕후 윤씨는 왕실의 기대 속에 인종을 낳았으나, 산후 후유증으로 7일 만에 사망했다. 당시 장경왕후를 간호했던 의녀가 한때 한류열풍의 신기원을 열고 산소같은 여자 이영애가 열연한 <대장금>이란 드라마로 유명한 ‘장금(長今)’이다. 오나라 오나라~~~

장경왕후가 사망후 새로이 중종의 세번째 계비가 된 이가 명종 생모 문정왕후 윤씨였지만, 1520년 인종이 6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 되면서 중종의 후계구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534년 문정왕후가 경원대군(훗날 명종)을 생산 하면서 중종의 후계는 복잡한 권력투쟁의 양상을 띠게 된다.

무엇보다 인종의 외삼촌 윤임, 유관과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 윤원로를 중심으로 한 외척 간 대립이 심해지고, 특히 훈구세력과 사림세력 대결구도가 고착화 되면서 권력 투쟁은 보다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 중종 이후 조선 역사는 윤임을 지지한 유관·유인숙 등은 대윤(大尹)으로, 윤원형을 지지한 윤원로·윤개 등은 소윤(小尹)으로 지칭되었고, 이 과정에서 명종의 친어머니 문정왕후의 존재는 큰 변수였다.

먼저 양측의 팽팽한 대립 속에서 1544년 11월 중종이 사망했다. 고명대신들의 주도로 인종이 왕이 되고 대윤이 권력을 잡았다. 왕위에 오른 인종은 회제 이언적, 하서 김인후 등 사림파를 등용하고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 김정 등을 복권시키는 조치를 취하면서 외척정치를 청산하려 했지만 재위기간이 고작 1년 으로 너무 짧았다.

왕위는 1년 전 경원대군에 책봉됐던 인종의 이복동생 명종이 이어 받았지만 당시 12살 어린 나이로 관례에 따라 생모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됐다. 결국 명종 즉위후 정국은 급변했다. 문정왕후와 소윤세력 윤원형은 대윤세력과 유관, 유인숙, 권벌 등 사림파를 숙청하는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키면서 공공연히 외척세도 정치시대가 열렸음을 알렸다.

이때부터 외척정치는 피를 보는 정치로 무법 정글의 혈투였고 외척세도정치는 역사에 별로 좋지 않은 국정농단 결과를 초래하였다. 문정왕후는 윤원형, 정난정과 외척정치 전성시대를 연출한 동시에 반대파를 가혹하게 탄압, 처형했다. 

1545년 '을사사화'에 이어 벌어진 1547년의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인해 사림파는 재기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초토화 되었다. 내용은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됐다’ 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문정왕후를 ‘여주’라 조롱하고, 그 아래에서 이기 등이 권세를 농간하고 있다는 양재역 벽서의 파장은 컸다.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등 3명이 역모혐의로 처형되는 등 많은 사람이 또 다시 희생됐다. 또한 사림파의 중심 이언적, 백인걸, 노수신, 유희춘 등 20여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를 갔다. 한편, 1559년부터 3년간 전국을 휩쓴 백정출신 의적 임꺽정 일당의 반란 또한 외척정치의 결과물로 농민 생활이 파탄에 이르러 일어난 사건이었다.

3. 왕후와 부처의 보우하사!

한편, 문정왕후는 민생을 외면했고, 자신의 기호대로 불교 중흥 정책을 실시했다. 1550년(명종 5년) 12월 문정왕후늘 친서를 내려 선종과 교종 양종의 복립을 명하면서 강남 봉은사를 선종의 본사로, 양주 봉선사를 교종의 본사로 삼았다. 사찰이 일방적으로 빼앗겼던 토지를 반환받게 하고, 연산군때 폐지된 승과제도까지 부활시켰다. 조선이 취한 불교 탄압 정책을 정면으로 거스른 정책이었던 만큼 신하들의 반대는 물론이고 성균관 유생들까지 나서 동맹휴학으로 맞섰지만 문정왕후는 뚝심 있게 불교 중흥을 추진했다.

현재 서울 강남의 최대 중심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봉은사는 450년전 문정왕후가 보우와 함께 불교 중흥의 마지막 꽃을 피워보려 했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문정왕후도 세월의 벽은 넘지 못했다. 1565년 4월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 일기로 사망하면서 외척정치는 종말을 고한다. 그녀가 죽었을 때 사관은 실록에 ‘서경(書經)’을 인용해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라고 적었다.

날개를 잃은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은 사림파의 탄핵을 받고 황해도 강음으로 유배된 후 최후를 맞았다. 보우는 유생들의 탄핵을 받아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 그곳에서 목사 변협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외척이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정상적인 정치 질서가 자리 잡지 못하고 민심이 이반하던 시대에, 왕 명종 아닌 문정왕후는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문정왕후는 사후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아들 명종은 어머니의 무덤을 태릉으로 조성했다. 중종 곁에 묻히려던 문정의 꿈을 아들이 지켜주지 못한 것이다. 명종의 무덤인 강릉(康陵)은 태릉 옆에 조성돼 있다.

4. 강릉 안내표지판
 
강릉은 조선 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다. 명종은 1545년 이복형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12세에 왕위에 올라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8년 후 명종은 직접 나라의 정사를 돌보며 외척 세력을 견제하고 고른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국정은 어지러웠다. 1567년 세상을 떠나 불암산 자락에 모셔졌다.

인순왕후 심씨는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명종이 세상을 떠난 후 조카 하성군(훗날 선조)을 양자로 입양하여 왕위에 올렸으며 8개월 간 수령청정을 하였다. 1575년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모셔졌다.
*수령청정은 대비가 발(창문이나 처마에 걸어 햇볕 등을 가리는 물건)을 내리고 정치 상황을 듣는다는 의미로, 어린 왕을 도와 정치에 참여하는 것.

5. 왕릉답사를 마치며
 
한 여름 시원한 단비가 내리고 있다. 강릉을 답사하며 문정왕후 이야기가 더 많은 기술되었다. 어쨌든 명종은 사후에도 어머니의 그늘 곁에 있게 되었지만 1966년 태릉선수촌이 조성되면서 두 모자는 서로를 쉽게 보지 못하는 형국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명종은 죽어서도 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2026. 6. 27.

강경만/ (한솔노무사사무소 대표/포천신문 자문위원회 부위원장)

ⓒ 포천신문
ⓒ 포천신문
ⓒ 포천신문
ⓒ 포천신문
ⓒ 포천신문

*칼럼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26년 07월 16일
- Copyrights ⓒ포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
 
PBS 포천방송 TV
경기도
생활상식
가장 많이 본 뉴스
정보 커뮤니티
상호: 포천신문 / 주소: 경기 포천시 해룡로 130-38 (동교동)
발행인·편집인 : 김현영, 편집인 강신옥 / mail: ipcs21@hanmail.net / Tel: 031-542-1506~7 / Fax : 031-542-1115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기 아50080 / 등록일 : 2009년 6월 22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현영
Copyright ⓒ 포천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