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의 선비정신 54]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 목은 이색(牧隱 李穡)

공민왕 17년, 시중 유탁이 왕에게 마암영전(馬岩影殿) 공사를 중지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공민왕은 상소를 보고 노하여 이색에게 유탁을 옥에 가두고 심문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공민왕은 이 기회에 유탁을 제거하기 위해 이색에게 유탁을 사형에 처한다는 교서를 작성하라고 명하였다.

이색이 물었다.

"그의 죄명이 무엇입니까?"

공민왕은 유탁의 죄를 일일이 열거하였다.

ꡒ오랫동안 시중으로 있으면서 극심한 가뭄이 들었으니 그가 옳지 않은 일을 했다는 것이 첫째요, 두 번째는 연복사 토지를 빼앗은 죄요, 셋째는 공주가 죽었을 때 사흘 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은 죄요, 또 장례의 격을 낮춘 것이 네 번째 죄다. 이보다 불충한 죄가 어디 있는가?ꡓ

공민왕의 말을 들은 이색이 아뢰었다.

"그것은 모두 지난 일입니다. 만일 그를 죽이면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백성들은 그가 전하께서 하시고자 하는 공사를 중지시키고자 이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한 전하께서 열거한 네 가지 죄는 죽을죄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왕은 더욱 노하여 다급히 서둘렀다. 하지만 이색은 바닥에 엎드려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제가 차라리 죄를 입을지언정 어찌 감히 없는 죄를 조작하여 교서를 짓겠습니까? 또 상소를 올린 것으로 친다면 유탁뿐 아니라 영도첨의(領都僉議)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영도첨의는 곧 신돈이었다. 때마침 신돈이 왕의 곁에 앉아 있었다. 신돈은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오자 부득이 사실을 고백하였다.

"이 늙은이도 알고 있었으나 전하께서 노한 까닭에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공민왕은 자신이 총애하는 신돈에게까지 화살이 겨누어지자 급히 시중 이춘부를 불러 들였다. 이춘부가 대령하자 공민왕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대들에게는 임금이 필요 없는 모양이구려. 불충한 자에게 죄를 묻고자 하거늘, 신하가 이토록 어명을 거역하고 있으니 과인은 허수아비가 아니고 무엇이오? 이제부터 나는 임금이 아니니 어서 옥새를 봉하라!"

공민왕의 명령이 준엄하였으나 이춘부는 머리를 숙이고 감히 다가가지 못하였다. 그러자 곁에 있던 신돈이 공민왕에게 말했다.

"시중에게 명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어명을 거역한 자에게 옥새를 봉하도록 하십시오."

그러자 공민왕은 이색에게 옥새를 봉하라고 명령했다. 이색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왕이 더욱 노할 것을 염려하여 곧 옥새를 함에 넣고 열쇠를 채웠다. 그런 다음 붓을 들고 함 위에 이렇게 써넣었다.

"신(臣) 이색은 삼가 봉한다."

옥새가 봉해지자 왕은 더욱 화를 내며 소리쳤다.

"과인이 덕이 없어서 신하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구나!  그대들은 이 옥새를 가지고 덕이 있는 임금을 찾아 섬기거라. 이 나라를 세운 태조인들 처음부터 왕의 후손이었겠는가? 나는 이제 왕위에서 물러나련다."

공민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후궁으로 물러갔다. 그러고는 앞으로 식사를 가져오지 말라고 좌우에 명하였다.

이튿날, 신돈이 공민왕을 찾아가 말했다.

"어명을 어기고 불충한 죄를 저지른 이색을 옥에 가두고 찬성사 이인임과 지도첨의 유연을 시켜 왕명 불복종의 죄를 묻게 하십시오."

이에 공민왕은 이인임과 유연에게 이색을 심문하게 했다. 심문을 받게 된 이색은 땅바닥에 엎드려 울며 소리쳤다.

"이 몸은 가난하고 문벌이 변변치 못한 몸으로 외람되이 전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공로나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다만 보잘것없는 학식을 가졌다 하여 갑자기 재상에 이르렀으니 전하의 은혜가 크고 깊어 그것을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신은 조금이나마 전하의 덕을 높일 수 있다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은혜에 보답하려 하였습니다. 저의 울음은 옥관(獄官)의 동정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전하의 귀에 들리게 하려는 것도 아니며, 죽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이 한 가지 과실로 인하여 전하의 명성이 온 세상과 후세에 아름답지 못한 이름으로 남을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이인임이 이색이 한 말을 공민왕에게 보고하였다. 그 말을 들은 공민왕은 마침내 감동하여 이색을 풀어주고 유탁도 석방하였다. 그런 다음 공민왕은 이색을 불러 말했다.

"목욕하고 나오시오, 그대와 더불어 일할 것이오."

그리하여 이색은 다시 조정에 들어올 수 있었다.

훗날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에 성공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조선을 개국한 후 이색을 시기하던 정도전 등이 그를 죽이라고 청했으나 이성계는 그 말만큼은 따르지 않았다. 이성계는 예전부터 이색을 존경하여 일찍이 자신의 자(字)와 당호(堂號), 그리고 둘째아들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색은 이성계에게 이렇게 말했다.

"계수나무 꽃은 가을에 희고 깨끗하오, 또 계수나무와 짝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소나무만한 것이 없소. 그대가 중하게 여기는 것은 절개와 의리일 것이니 자를 중결(仲潔), 당호를 송헌(松軒)으로 하는 게 어떻겠소? 또 셋째아들의 이름이 방의(芳毅)이니 둘째아들은 방과(芳果)로 짓겠소."

자신의 아들 이름을 부탁할 정도로 이성계는 이색을 존경했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후에도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옛 친구로 서로 만날 것을 청하였다. 이색은 몇 번이나 거절하다가 부득이 백의(白衣)를 입고 볏짚으로 엮은 모자를 쓴 채 대궐로 향했다.

이성계가 그를 만나기 위해 뛰쳐나왔으나 이색은 다만 고개를 숙일 뿐 절을 올리지 않았다. 이성계가 친구간의 예로 대하면서 말했다.

"덕이 부족하고 식견이 어두우니 나를 버리지 말고 부디 한 말씀 가르침을 주시오."

이색이 말했다.

"망국의 신하로서 살아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저를 보시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라옵건대 이 몸을 보내주시어 고향에서 죽도록 해주십시오."

잠시 후 곁에 서있던 시종이 그를 신하의 반열로 인도하자 이색이 말했다.

"이 늙은이가 앉을 만한 곳이 없소이다."

그러면서 이색은 꼿꼿이 일어나 나가버렸다. 이성계가 그를 한산백(韓山伯)에 제수했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이듬해 여름 그는 여주 강가에서 피서를 하고 있었는데, 이성계가 그를 위해 내시를 파견하여 호송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는 도중 독에 중독되어 배에서 죽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정도전 일파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태조가 이를 알고 호송하던 내시를 죽이고,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색(李穡)

1328년(충숙왕15) ~ 1396년(조선 태조 5).

이색을 이야기할 때는 그의 아버지 이곡(李穀 : 1298~1351)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곡의 호는 가정(稼亭)인데, 신흥사대부로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동문선』에 백여 편에 가까운 작품이 수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가전체 문학의 대표작인 『죽부인전(竹夫人傳 )』을 저술하여 우리 문학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이색은 1341년(충혜왕 복위2)에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4)에는 원나라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3) 부친상을 당해 귀국한 후 정치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며,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가서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원나라에서 두루 벼슬을 역임한 그는 다시 귀국하여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하여 정방(政房)을 폐지하였다. 주요 요직을 거치면서 정몽주, 이숭인 등을 학관으로 채용하여 신유학 보급과 성리학 발전에 공헌하였다. 특히 그는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변계량(卞季良) 등의 문인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쫒겨나자 창왕을 옹립함으로써 이성계 세력을 견제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세력을 잡게 되자 유배되었다가 다시 석방되었다.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금주(衿州)로 추방되었다가 여흥, 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풀려났다. 이성계의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