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검 묘(李思檢 墓)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 38호
소 재 지 : 포천시 창수면 가양리 213-1
비 고 : 이사검
이사검(李思檢)운 조선조의 무신. 본관은 陽城, 시호는 공소(恭昭), 고려의 강능도절제사(江陵道節制使) 자헌대부(資憲大夫) 정절공(靖節公) 이옥(李沃)의 아들, 벼슬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좌찬성(左贊成) 양성부원군(陽城府院君)이다.
1405년 (태종5) 무과에 급제 司直을 지내고 1408(태종 8) 양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태종의 명으로 세자전좌관(世子傳佐官)으로 보좌. 상호군(上護軍)으로 승진 후 平山에 있었다. 1409년 (세종1) 왜구로 임명되어 소수의 선박으로 유화책(宥和策)을 써서 원병을 기다리며 대치하다가 결국 적선이 물러 갔는데 싸우지 않았다 하여 옹진으로 평직된다. 이 사건 이후 대마도 정벌을 하게 된다. 1427년(세종9) 상호군(上護軍)으로 진응사가 되어 海靑(조선산 매)을 가지고 明나라로 가던중 매가 죽자 죽은 매를 가지고 北京에 이르러 황제의 대궐에서 절하면서 우니 明황제(皇帝)는 ꡒ사람이 죽는데도 능히 살릴 수 없는데 하물며 짐슨아니겠는가?ꡓ함에 공이 대답하기를 ꡒ신이 우는 것은 다만 우리 임금님의 충성을 온전히 하지 못한 일이 한스러울 뿐입니다.ꡓ하니 황제가 이를 치안하면서 장군모(將軍帽)를 내렸다. 1429년 (세종 11) 좌군첨총제(左軍僉總制), 1430년(세종 12) 경상좌도처치사(慶尙左道處置使)로 왜인들의 사변을 우려 성을 축조함에는 연호군(煙戶軍)으로 할 것을 품의하다. 1432년(세종14) 판의주목사(判儀洲牧事)로 부임 「여지승람」(輿地勝擥)과 「의주명관」(儀州名官)에도 실리다. 1434년(세종16)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明나라에 正朝使로가 북방 변경의 경보를 알리고 칙서(勅書)를 받아오다. 1437년(세종19) 경상좌도도절제사(慶尙左道都節制使)를 거쳐 1439년(세종21)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왜인의 침입에 대비하는 비변책(備?策)을 건의. 세종은 병조(兵曹)에서 시행케 하다. 이 해 성절사(聖節使)로 떠나 明나라에 다녀와 예악(禮樂)에 관한 서적도 구해오다 1440년(세종22) 인수부윤(仁壽府尹),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阮事)로 말 1필 하사받다. 1443년(세종 25) 인순부윤(仁壽府尹)이 되고 이 해에 하삼도목장(下三道牧場)을 순찰, 144년(세종27) 도진무(都鎭撫)로 군사 150명을 인솔 行宮근방의 도둑떼 20여명을 잡아 의금부에 가두고, 사복기제조(司僕奇堤調)가 되어 제주도 외에 泰安 ? 巨濟 등지에 말 목장을 둘 것을 건의하다. 이 해에 자헌대부(咨憲大夫) 지충추원사(知中樞院事)에 오르고 이듬해 1446년(세종28) 8월 29일 66세로 졸하다.
1일동안 조회를 철폐하고 조부(弔賻)와 치제를 의식대로 하다. 공소(恭昭)란 시호를 내렸으니 집사(執事)함이 견고한 것을 恭이라 하고 용의가 恭美 한 것을 昭라 한다. 공은 수염이 아름답고 천성이 관후하였으며, 직무에 종사하여 게을리 함이 없었다.
아들은 이휘(李徽)인데 공조참의(工曹參議)로 1456년(세조2) 死六臣인 成三問 및 처남인 이개(李塏)와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화를 입어 순절하였다. 후일 숙종조에 신원(伸寃)하여 공주동학사(公州東鶴寺) 숙모전(肅募殿)에 사육신과 함께 영위를 봉안, 춘추로 제향을 지낸다.
묘역현황
묘 : 1기(가로 630㎝, 세로 820㎝)
묘비 : 2기(높이 130㎝, 넓이 45㎝, 두께20㎝)
유명조선국자헌대부(有名朝鮮國資大夫)
지중추원사 (知中樞院事)
시공소공 이사검지묘 (諡供昭公 李思檢 墓)
유명조선국(有名朝鮮國) 이천서씨지묘(利川徐氏之墓)
무인석 : 2기(높이 190㎝, 둘레 190㎝)
상 석 : 2기(가로 135㎝, 세로 80㎝)
제주석 : 1기(가로 135㎝, 세로 80㎝)
호 석 : 1식(길이 210㎝, 높이 30㎝, 두께 18㎝)
특 색 : 사각으로 돌린 호석위에 봉분이 있으며 무인석의 투구 형탸가 명황에게서 하사받은 장군모를 본 뜬 것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특이한 무인석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