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붕은 성격이 활당하고 절개가 있었다.
당시 유자광은 무오사화를 일으켜 공신이 된 후 무령군에 봉해졌으나 간사하고 탐욕이 많았다.
또 방자하기 이를 데 없어 그 기세가 조정을 휩쓸었다.
정붕은 유자광과 외가쪽으로 친척이었으므로 마주치면 문안하는 예를 올리긴 했으나 조금도 신세를 지려 하지 않았다.
간혹 여종을 시켜 유자광의 집에 보낼 대는 반드시 삼 껍질로 만든 끈으로 팔을 단단히 묶고, 묶은 자리에 표시를 해서 보냈다가 돌아온 다음에야 풀어주었다.
그것은 묶인 곳이 아파서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급히 갔다가 빨리 돌아오라는 뜻이었다.
한번은 정붕이 숙직을 하는 날이었는데 집에 양식이 떨어졌다.
부인이 고민 끝에 유자광의 집으로 여종을 보내 양식을 꾸어줄 것을 청하였다.
유자광이 그 소리를 듣고는 혼연히 말하였다.
"그래도 우리는 친척인데 어찌 도움을 주지 못하겠는가? 비록 정붕이 지나치게 괴팍하고 고집스럽지만 내 어찌 괄시 하겠는가?"
그러고는 곧 살을 자루에 넣고, 항아리에 장을 가득 담아 노새에 실어 보냈다.
아내는 유자광의 집에서 빌려온 쌀로 밥을 짓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정붕이 퇴근해 보니 밥상 위에 평소 보지 못하던 옥 같은 쌀밥이 차려져 있었다.
정붕이 의아해하며 부인에게 물렀다.
"이런 쌀이 도대체 어디에서 난 거요?"
부인은 숨길 수 없어 사실대로 말하였다.
그러자 정붕은 밥상을 밀치고 일어나며 말했다.
"숙직하던 날 아침에 비지를 사다가 죽을 쑤어주기에 나는 양식이 이미 떨어진 줄 알았소. 그런데도 내가 조처를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나의 이것은 나의 실수이지 부인의 허물이 아니오."
그러고는 곧바로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 쌀을 빌렸다.
그런 다음 빌려온 쌀에 밥을 지었던 쌀의 양만큼 채운 후 유자광에게서 받은 쌀자루와 장을 담은 항아리를 노새에 실어 모두 돌려보냈다.
1504년(연산군 10) 그는 홍문관 교리로 있으면서 갑자사와에 연루되어 영덕으로 유배되었다. 그가 귀양을 떠나게 되자 유자광이 독약주머니를 보내며 이런 말을 전하였다.
"이번에 가면 끝내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 이 독약주머니를 가지고 있다가 더 고통을 당하기 전에 자결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2년 뒤 중종반정이 성공하여 연산군이 폐위되자 그는 유배지에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후 연산군 밑에서 세도를 누렸던 유자광이 오히려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때 정붕은 간수해 두었던 독약주머니를 유자광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이것은 예전에 그대가 나에게 준 것이오. 귀양 중에 꼭 필요할 것 같아 돌려드립니다."
중종반정이 성공한 후 정붕은 다시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또 조정에서 헌납(獻納) 벼슬을 내렸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자 여러 벗들이 그에게 받아들일 것을 권고하였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교리에 부임하였다가 도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벗들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조정에 나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돌아왔는가? 도대체 무슨 일인가?"
그러자 정붕은 친구들에게 말했다.
"자네들이 권유에 못 이겨 마지못해9 관직에 나갔네. 그런데 승정원에 가보니 잘 차려입은 어떤 재상이 서 있더군. 뒤로 물러서자 자세히 살펴보니 홍경주였네. 사람들에게 그의 관직을 물러보니 어느새 찬성이 되어 있더군. 것을 본 뒤부터 관직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네."
홍경주는 중종반정 때 군대 동원의 책임을 맡아 거사를 성사시킨 후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오른 인물이었다.
훗날에는 조광조(趙光祖)가 아무런 공도 없이 공신에 오른 자들의 이름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자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숙청한 후 권력을 장악하기도 했다.
그런 인물이 조정의 높은 벼슬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여 정붕은 마침내 사직하고 돌아온 것이다.
정붕이 다시 벼슬에서 물러나자 조의정 성희안이 임금께 아뢰어 특별히 교지를 내려 부르도록 했다. 하지만 정붕은 끝내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정붕이 관직에 관심이 없음을 알고 한직인 청소부사에 임명하였다.
이에 정붕은 마지못해 청송에 부임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그는 절조가 워낙 깨끗하여 감히 뇌물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반정의 공신인 성희안과 평소 친하게 지냈는데, 그때 성희안은 영의정이었다.
어느날 성희안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 청송의 토산물인 잣과 꿀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그는 성희안에게 편지를 써서 답했다.
"잣은 높은 산에 있고 꿀은 여염집 벌통 속에 있는데 제가 무슨 힘으로 그것을 구하겠고."
이에 성희안이 몹시 부끄러워했다.
그후 정붕은 벼슬을 사직하고 한양으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정붕(鄭鵬)
1467년(세조13) - 1512(중종7)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이다.
정석견의 조카이기도 하며,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86년(성종17) 진사가 되고, 149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정자.정언을 거쳐 1504년(연산군10) 교리로 있으면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영덕에 유배되었다.
무오사화.갑자사화로 많은 사림파가 주살(誅殺)을 당할 때 현명하게 처신, 몸을 보존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다시 교리에 복직되어 상경 중 병으로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뒤 정승 성희안의 건의에 따라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홍경주 등 간신배가 조정에 있음을 알고 낙향하자 청송부사에 임명하였다.
재임 3년 만에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천성이 매우 청백하여의가 아닌 것은 행하지 않았다.
일찍이 영의정 성희안과 젊어서부터 친교가 있었으며, 길재의 학통과 김굉필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성리학자인 박영(朴英)이 그의 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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